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나옹화상의 삼구(三句)와 삼관(三關)

나옹화상의 삼구(三句)와 삼관(三關)
 
 

불교에서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인데요, 화두공부는 진리로 향하기 위한 궁구의 출발점으로, 모든 인지수단을 무용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言語)’을 궁구하여 사유방식과 분별이 통하지 않는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말이 만들어내는 의도와 의미를 차례차례 없애서 결국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만 남게 하는 수양법입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는데요,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인 임제(臨濟) 의현(義玄)의 법어(法語)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인데요, 그러므로 잡념을 만나면 잡념을 죽여야 하겠지요. 바로 이 잡념을 죽이는 방법이 화두공부입니다.
 
화두는 말을 생각으로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데요, 깊은 생각은 잡념을 없애며, 순수한 생각은 무상무념으로 이어집니다.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고 말 그 자체만 남으면 생각이 말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그래서 모든 말은 그 의도와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것이죠. 그 경지에 이르면 말은 의사전달수단이라는 순수한 목적만 남게 되므로 말 속에 의도와 의미를 숨길 수 없게 됩니다. 말이 청정해지면 무념무상 상태가 되므로 정신이 청정해지고, 그러면 마음이 곧 부처가 되는 거겠죠.
 
화두에는 법신변사(法身邊事) 화두가 있고, 여래선(如來禪) 화두가 있으며, 향상구(向上句), 향하구, 최초구(最初句), 말후구(末後句), 일구(一句), 이구, 삼구 등의 화두가 있습니다.
 
고려 말에는 간화선이 유행했는데요, 이 시기의 불교는 원나라 불교의 영향으로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였습니다. 그래서 절은 왕실이 내린 토지와 귀족들이 시주한 토지, 그리고 노비를 많이 소유하게 됐고,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사원경제가 확대됐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불교가 자정능력을 상실하면서 사찰과 승려의 세속이 이루어지고 승려들이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과 양조업을 하는 등 여러 폐단이 발생했는데요, 이러한 때에 신흥학문인 성리학이 일어나면서 불교는 유학자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에 불교의 위기를 느낀 나옹과 태고(조계종 종조 보우普愚) 등은 일반 백성에게도 불법을 전파하여 그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는 불법보편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또 국내외의 선사상을 두루 계승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법으로 교계를 정화하려는 자정운동을 펼치며 선풍을 이끌었는데요, 간화선 참선법이 일반 백성에게 불법을 전파하기에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간화선에서는 관문(關門), 즉 주어진 화두에 참구하는 것을 진리를 향해 가는 구도의 길로 봅니다. 화두는 견고하게 잠긴 문이고, 이 화두의 빗장을 푸는 승려만이 진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데요, 그래서 간화선사들은 제자를 받을 때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차례로 물어 화두를 참구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청룡사지가 있는데요, 그곳의 충주청룡사보각국사환암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에는 환암 혼수스님이 스승인 나옹화상의 삼관에 답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옹화상(懶翁和尙), 즉 혜근(惠勤)스님은 고려 말에 활동한 명승인데요, 공민왕에 의해 왕사에 책봉되기도 해서, 지공화상, 무학화상과 함께 삼대화상으로 존숭되고 있습니다. 그 나옹화상의 삼구와 삼관(三觀)에 대해 살펴볼 텐데요, 삼구는 생각이 없는 무억(無憶), 감정이 없는 무념(無念), 망령됨이 없는 막망(莫忘)의 세 가지 선에 관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고, 삼관은 선지식(善知識)의 세 가지 질문을 말합니다.
 
 
보각국사 환암은 나옹화상의 제자인데요,
환암은 오대산 신성암에 머물다가 고운암에 머물던 나옹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때 나옹은 환암에게 삼구와 삼관을 차례로 물어 화두를 참구하는 절차를 밟았겠지요.
 
 
나옹의 삼구로는 입문삼구(入門三句)’가 있습니다,
 
入門句分明道(문에 들어가는 글자를 분명히 말하라)
當門句作麽生(문에 도달한 글자는 어떠한가?)
門裏句作麽生(문 안의 글자는 무엇인가?)
 
이것이 나옹의 입문삼구인데요,
 
나옹이,
 
問入門句(“들어오는 문의 입구에 있던 글자는 무엇인가.”)
 
라고 묻자 환암은,
 
入已還同未入時(“들어와서 멈추니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들어올 때 보지 못한 글자를 보기 위해 돌아나가는 것은 들어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로, 이미 법문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속세에 남긴 미련을 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뜻이겠지요.
 
 
다음은 나옹이 환암에게 물은 삼관을 보겠습니다.
 
삼관은 삼관어(三關語)라고도 합니다. 대표적 삼관으로는 능엄경의 중국 항주 천축사 자운스님의 능엄삼관이 있습니다. 능엄삼관은 진(), 정묘원(精妙元), 성정명심(性淨明心)을 해석하는 방법을 묻고, 또 시공간을 뜻하는 숫자인 34, 43을 곱하면 12이고 세 번을 반복하면 일십백천이라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물으며, 육근(六根: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육진(六塵: , , , , , ) 육식(六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7(七大: , , , , , , )의 이십오성(二十五聖)에 대해 문수보살 혼자서 관음을 얻었다고 한 이유를 묻습니다.
 
임제(臨濟) 의현(義玄)이 개조한 임제종에서는 황룡파 시조 황룡스님의 황룡삼관이 있습니다. 상좌(上座), 즉 선사 원로들의 생연처(生緣處: 태어난 인연이 끊어진 곳)는 어떤 곳인지 묻고, 나의 손은 붓다의 손과 같은지를 물으며, 내 다리와 나귀다리가 같은지를 묻습니다.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만물이 같다면 무엇이 같은지를 묻는 말입니다. 그 외에 몽산스님이 고안한 몽산삼관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옹의 삼관은 어땠을까요?
 
, 又以三關問曰 山何嶽邊止(나옹이 또 삼관으로 물었다. “산은 어찌하여 큰 산의 주변부에 그쳤는가?”)
 
. 逢高卽下遇下卽止(답하였다. “높은 것을 만나 낮아지고, 낮아진 것에서 그치었습니다.”
 
. 水何到成渠(물었다. “물은 어찌하여 개천을 이루었는가?”)
 
. 大海潜流處成渠(답하였다. “대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이 그곳에 닿아 개천을 이루었습니다.”)
 
 
. 飯何白米做()(물었다. “밥은 어째서 백미로 짓는가?”)
 
. 如蒸沙石豈成嘉(답하였다. “찌는 것이 같다고 어찌 모래와 돌로 이루겠습니까.”)
 
 
나옹이 삼관으로 묻고 환암 혼수스님이 답한 내용인데요, 산을 작은 사람에 비유하여 작은 사람은 왜 작은가를 묻고, 큰 사람 옆에 있어 작아 보이고 작은 것에서 그쳤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작은 인물에 그쳤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요.
 
또 물이 개천을 이룬 것을 묻는데, 혜안을 지녔는지 알아보려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환암은, ‘바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감정이 개천이라고 대답합니다. 개천은 바다의 깊은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말로, 비록 작은 물줄기라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이겠지요.
 
찌는 것이 같다고 어찌 모래와 돌로 이루겠습니까.” 라는 환암의 대답은, 같은 방법이라도 재료가 다르면 다른 것이 만들어진다는 말로, 같은 참선법이라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에 따라 그 깨달음이 다르다는 뜻일 겁니다.
 
 
위에서 보았듯, 나옹의 삼구는 사물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눈을 요구하고 있고, 삼관은 자연 속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제자의 답변에 깨달음이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 인간의 심신이 사물에 어떻게 녹아들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옹화상의 삼구 삼관은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는 인간, 즉 만물일체사상에 기초한 선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 󰡔동문선󰡕(서거정 등 저, 양대연 역, 한국고전번역원) 나옹 근혜의 법맥(이철헌,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수료), 나옹삼관의 선사상 고찰(염중섭, 동국대학교 강사), 나옹화상의 선사상(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조교수), 󰡔고려말 나왕의 선사상연구󰡕(김효탄 저, 민족사. 1999,09,20), 󰡔고려사󰡕(경인문화사), 나옹화상의 생애와 계승자(허흥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한국 간화선의 개화-태고와 나옹을 중심으로(김영욱,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불우헌집󰡕(정극인 저, 김홍영 역, 한국고전번역원), 나옹작 서왕가일고(이병철, 신라대학교 교양과정학부 교수),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사상적 만남(고혜령,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
 
 
 

2019년 9월 15일 일요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무흘구곡, 심경발휘, 오선생예설분류 등을 중심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무흘구곡(武屹九曲)"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지은 한시인데요, 한강선생은 경북 성주군 수륜면의 대가천(大家川) 계곡을 무흘이라 이름 짓고 그 곳의 비경(秘境)을 일곱 글자 씩 네 수, 합쳐서 스물여덟 자의 칠언절구로 지었는데, 모두 아홉 편입니다. ‘무흘은 중국 리학자 주희가 지은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따온 지명인데요, 한강이 지은 "무흘구곡" 또한 "무이구곡"을 본떠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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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비암
 
첫째 굽이라 여울 위에 낚싯배 떠 있고(一曲灘頭泛釣船)
실바람 감아 도는 석양의 시내로다(風絲繚繞夕陽川)
누가 알까, 쓸모를 다하여 버려진 인간의 생각을(誰知捐盡人間念)
다만 박달나무 노를 잡고 저녁연기에 사악한 생각 털어볼 뿐(唯執檀槳拂晩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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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봉비암인데요,




 
 
 
여기는 회연서원인데요, 회연서원 뒤편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봉비암입니다. 이쪽에서 보면 절경 같지 않지만 봉우리에 올라가면 바위절벽 아래로 대가천이 흐르고 있어 매우 아름답습니다.
회연서원이 있는 저 자리엔 원래 회연초당이 있었습니다. 한강 정구는 4~50대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고향 땅인 이곳에 회연초당을 지었는데요, 후에 제자들이 그 자리에 서원을 지어 한강선생을 배향했고, 1690년 숙종임금이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함께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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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의 제2곡은 한강대(寒岡臺)’인데요, 창평산 서쪽 바위 정상으로, 정구의 호를 따서 한강대라고 부릅니다.
 
둘째 굽이라 빼어난 누이인가, 불보살이 빚어놓은 봉우리로세(二曲佳妹化作峰)
봄꽃 가을단풍으로 단장한 용모(春花秋葉靚粧容)
그 해에 만일 굴원이 알았다면(當年若使靈均識)
이소경 한 편을 또 지어 보탰으리(添却離騷說一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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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학정입니다.
 
셋째 굽이라 이 골짜기에 누가 배를 감추었나(三曲誰藏此壑船)
짐을 진 사람이 밤을 지새우며 이미 천 년을 기다렸으니(夜無人負已千年)
큰 강 건널 근심이 어찌 한이 되지 않았으랴(大川病涉知何限)
건너갈 방도 없어 가련할 뿐이어라(用濟無由只自憐)
 
이렇게 무학정이 있는 골짜기를 표현했는데요, 배를 닮은 바위인 선암, 혹은 주암이 있고, 그 바위 위에 무학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에 선암, 혹은 주암을 일컬어 골짜기에 감춘 배라고 읊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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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곡은 입암입니다. ‘입암은 서 있는 바위라는 뜻이기에 선바위라고 하죠.
 
넷째 굽이라 백 척 바위에 구름 걷히니(四曲雲收百尺巖)
바위 위 화초는 댓바람에 머릿결 날리고(巖頭花草帶風髮)
이 가운데 싱그럽기 이 같음을 뉘 알꼬(箇中誰會淸如許)
저 하늘 달그림자 못 속에 떨어졌네(霽月天心影落潭)
 
대가천의 계곡물이 휘돌아가는 곳에 바위가 솟아 있는데, 정구는 그 아래에 산천암을 짓고 심신을 수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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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인암인데요, ‘사인암은 큰 바위입니다. 옛날에 사인(舍人)벼슬을 한 사람이 그곳에 살았다고 해서 사인암으로 불리게 됐다는데, 그 바위는 홍수에 유실되고 지금은 없다고 합니다.
 
다섯 굽이라 맑은 못 그 얼마나 깊은고(五曲淸潭幾許深)
못가의 송죽이 스스로 숲을 이루었네(潭邊松竹自成林)
복건을 한 사람 상당에 앉아서(幅巾人坐高堂上)
인심과 더불어 도심을 강설하네(講說人心與道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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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 5곡까지 살펴봤는데요, "무흘구곡"은 이렇게 제9곡까지 이어집니다. 6곡은 흐르는 물이 옥이 구르는 것 같다하여 옥류동으로 불리는 계곡을 읊었고요, 7곡은 무흘정사가 있던 장소인 만월담입니다. 정구는 그곳 무흘정사에서 스님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8곡은 와룡암인데, 시내 가운데에 누워 있는 용 모양의 바위에 대해 읊은 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9곡은 용추폭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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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가 세상을 떠나고 약 160여 년이 흐른 1784(정조 8)에 후세들에 의해 "무흘구곡"을 그린 실경산수화 "무흘구곡도"가 그려졌는데요, 정구의 사적을 새롭게 정비하고 그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다고 합니다.
이만운은 "무흘구곡도" 발문에,
 
우리 한강 정선생께서 회암부자(晦庵夫子: 주자)의 도를 궁행하여 학문에 정진하고 노래로 읊은 곳이 바로 무흘의 한 구역이니, 회암의 무이와 같은 곳이다. 선생은 일찍이 "무이지"를 증찬하고 또 구곡시에 화운하여 그 미세한 뜻을 지적했다. 후세의 사람들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고 암벽에다 새겼다. 또한 그림을 그려 첩을 만들어서 무이의 고사를 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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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했는데요, 정구의 시를 바탕으로 후세 사람들이 무흘구곡을 정하고 각 곡에 곡명을 정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776년 바위에 곡명을 새겼고, 8년 후에 그림이 그려진 것이죠.
 
"무흘구곡도"는 종가소장본과 정재국 소장본이 있지만 종가 소장본은 현재 분실된 상태라고 합니다. 종가소장본은 수묵으로 그린 구곡 아홉 폭이 순서대로 있고, 마지막에 서운암도가 더해져 있습니다. 뒷면에 정구의 앙화주부자무이구곡시운십수(仰和朱夫子武夷九曲詩韻十首)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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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국 소장본은 수묵으로 그린 옅은 남색조 채색의 그림에 별도의 장지를 붙여 주자의 무이도가십수를 차운한 정구의 시와 정구의 6세손 정동박의 차운시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흘구곡도라는 제첨이 붙어 있는데요, 가장 앞쪽에 서운암도가 있고, 이어서 구곡이 순서대로 장첩되어 있습니다. 그린 사람은 영재(嶺齋) 김상진(金尙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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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정구는 선조, 광해군, 인조 연간에 활동한 대학자였는데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므로 퇴계학파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남학파의 주자학, 즉 리학은 경상좌도의 퇴계와 경상우도의 남명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정구가 퇴계와 남명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시절의 조선 성리학은 이언적, 김굉필, 이황, 조식, 성혼, 이이 등이 리기론과 심성론에 관한 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심화시킨 제1세대 학술부흥기였는데요, 정구의 할아버지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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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1563년 스물한 살 봄에 퇴계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했고, 1566년에는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했습니다. 제자에 대한 칭찬이 인색하기로 유명한 퇴계선생은 정구에 대해,
 
자질이 명민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옳은 것을 좋아하니 한훤당(김굉필)의 영향이 어찌 그 후손에게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찬하며 그 실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정구는 도산서당에 머물며 퇴계로부터 "심경"과 예설을 듣고 가을에 향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지만 과장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요, 한양까지 가서 마음이 바뀐 이유는, 아마도 더 깊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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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으로 돌아간 정구는 학문에만 전념했습니다. 얼마 후 형인 정곤수도 도산서당을 찾아가서 정구와 함께 학문을 익혔습니다.
 
퇴계는 성균관 유생 시절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진덕수가 지은 "심경"에 명나라 학자 정민정이 주를 붙인 "심경부주"를 처음 접하고 이에 심취했다고 하는데요, 후에 "심경부주"를 보완한 심경후론을 저술하면서,
 
내가 도학에 감흥한 것은 바로 "심경부주"의 힘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퇴계는 "심경"이 주자학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심경"을 권했는데요, 퇴계의 ()’ 사상은 이 "심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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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또한 퇴계의 권유로 "심경"을 깊이 있게 익히고 연구했는데요, 이를 토대로 1603(선조 36)에는 "심경발휘"를 저술합니다. "심경발휘"오선생예설분류와 함께 정구의 대표적 저작인데요, "심경"에 선유들의 학설을 첨가했으므로 "심경부주"를 보완한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경부주"와 비슷하게 편장을 배열했는데요, 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해 얻은 지식으로 "심경부주"의 주해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고,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정호의 정성서, 정이의 호학론, 장재의 서명, 주희의 인설, 정호와 주희의 행장략등을 부록에 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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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발휘"는 정구의 심학연구가 축적된 결과물로 심학의 본질을 ()’에 두고 있는데요, 성현의 도통이 심학이며, 심학의 핵심은 이라고 "심경발휘"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추제협은 "심경발휘"와 정구의 심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심경발휘"경이직내장(敬而直內章)은 그 양과 질에서 정구의 심학이 짙게 녹아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정구의 심학적 체계 속에 경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겠지요. 정구는 경이직내장에서 정주의 말을 많이 인용하며 자신의 공부론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심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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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발휘"의 핵심은 경이직내(敬以直內), 즉 경으로 마음의 내면을 곧게 하는 것과, 의이방외(義以方外), 즉 의()로써 바깥으로 드러나는 마음, 다시 말해 행동을 반듯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정구는 이 두 가지가 성학으로 들어가는 핵심이라고 봤는데요, 그러면서 경이직내가 주()이고, 의이방외는 객()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경겸동정(敬兼動靜)항목을 통해 경은 동()과 정()을 겸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경이 정()이라면, 의는 동()에 해당하여 경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황의 미발의 존양공부와 이발의 성찰공부가 모두 경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견해, 풀어서 말하자면, 태어날 때 품부 받은 천리를 보존하는 존양공부와, 이미 감정이 발현한 후 행동을 반듯하게 하는 성찰공부가 모두 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견해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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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1566(명종 21) 봄 도산서당을 나와 덕산의 조식을 찾아갔고, 그에게서도 학문을 익혔습니다.
 
정구는 이황의 영향을 받아 심학에 심취했지만 그의 또 다른 관심은 예설이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예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서, 그동안 성리학적 연구가 미치지 못했던 예설을 학문의 한 분야로 성장시키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573(선조 6) "가례집람보주"를 저술했고, 1579(선조 12)에는 "혼례"를 저술했으며, 1582년에는 "관의"를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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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인조 7)에는 정이와 정호, 사마광, 장재와 주희 다섯 선생의 예설을 모아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펴냄으로써 유가의 의례와 법질서를 체계화시켰는데요, 전집은 천자와 제후의 예, 후집은 사대부의 예를 다루었습니다. 관혼상제와 잡례, 법질서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으므로 그 분량이 방대했는데, 발문은 장현광과 이윤우가 썼고, 관찰사 권태일이 도움을 줬습니다.
 
또 정구는 다섯 가지 상복(喪服)에 관한 연혁도인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를 짓기도 했는데요, 이 책은 그의 제자 이윤우가 담양부사로 있을 때 간행했습니다. 정구는 관혼상제 중에서도 특히 중시되는 상례에서 상복의 종류를 상기의 길고 짧음과 곡장의 유무로 정하고, 참최, 자최, 대공, 소공, 시마로 분류했는데, 이것을 이윤우가 2035세목으로 분류해 도표로 작성한 것이 "오복연혁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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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가 산수(算數)와 병법, 의약과 풍수 등 다양한 방면의 학문을 익히고도 예학에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예()가 곧 사회질서이고 가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제시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는 그 기본이 예의에서 시작돼야 함에도 1세대 학술부흥기에는 이론과 학설분석에 매달려 예학을 미처 돌아보지 못했는데요, 조광조 이전 세대에서의 성리학적 실천윤리의 기준은 절의였습니다. 정구는 그렇다면 그 이후세대의 실천윤리 기준은 예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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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근본으로 삼은 성리학이 현실정치에 적용될 때는 붕당으로 이어지고 정적을 숙청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학자라면 그것이 과연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실현인가?’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배울 때는 분명 민본과 위민정치, 경의(敬義)를 익혔을 텐데, 그 학자들이 현실정치에서는 붕당이념에 함몰되어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무조건 나쁘다는 주장만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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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것은 예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듯합니다. 기존의 도학정치에서 미래의 예학정치로 나아가면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이상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예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강선생문집"오선생예설분류서에는,
 
()는 하늘의 이치를 적절하게 형식화하여 인사(人事)를 의례적으로 규범화한 것으로, 그것을 분산하면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威儀: 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나 몸가짐) 삼천 가지가 질서정연하고, 그것을 통합하면 마음과 몸의 근간이 되어 잠깐도 군자의 몸에서 떠나지 않으니, 도덕과 인의가 그로 인해 이루어지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형제관계도 그로 인해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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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정구의 서문이 있는데요, 그가 왜 예학에 매달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구는 주자학의 두 축인 심학과 예학이 마음과 몸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봤고, 따라서 마음을 주재하는 경()과 몸을 반듯하게 하는 의()를 통해 형이상학적 이상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정구의 예학은 예를 리()와 성()의 차원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자와 주자의 예론을 계승했으며, 하늘과 개인, 사회와 국가로 연결되는 종합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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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마음의 이치이고, 예절은 개인의 심신을 다스리는 것이며, 예속은 사회와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고, 예제는 국가와 질서를 구축하는 것인데요, 정구의 예론은 그 층위를 균형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도층의 도덕적 모범과 교화에 의한 자발적 예의풍속을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정구가 연구한 예학은 영남예학의 기초가 되어서, 삼례(三禮), "주례", "의례", "예기"에 고례를 소급 적용하여 발전하게 되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김장생 또한 예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장생의 예학은 기호학파 예학의 기초가 되는데요, 퇴계학파와 기호학파는 각기 예학을 연구하여 학문으로 발전시켰고, 정치적으로는 예송(禮訟)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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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되기도 했습니다. 정구가 추구한 예학정치의 이상실현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지요.
정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제자 허목은 한강 정선생 만사,
 
(……)
, 정사에 종사한 지 얼마였던가(嗟從政其詎幾)
일찍이 작은 걸로 시험할 수 없었고(曾不可以小試)
세상과 자신이 서로 어긋나(世與我而相違)
끝내 평소 품은 뜻 펼치지 못하셨네(終未展夫素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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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을 낙으로 삼고 (맹자가 말씀하신)도리를 얻었으니(樂天命而安義)
비록 도학은 부정했어도 심학에서는 통달하셨음이라(雖道否而心亨)
황천은 어찌하여 선생을 남겨 두지 않고(何皇天之不憖)
이 철학자를 돌아가시게 하였단 말인가(伊哲人之云亡)
(……)
 
라고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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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에 종사한 지 얼마였던가/ 일찍이 작은 걸로 시험할 수 없었고/ 세상과 자신이 서로 어긋나/ 끝내 평소의 뜻 펼치지 못하셨네
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이는 정구가 정치적 실험을 위해 관직에 나아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천명을 낙으로 삼고 도리를 얻었으니/ 비록 도학은 부정했어도 심학에서는 통달하셨음이라
라고 한 것은 절의로 상징되는 도학정치에서 심학을 바탕으로 한 예학정치로의 전환을 추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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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1573년 절친인 김우옹의 천거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지만 부임하지 않습니다. 그 후로도 수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지만 모두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데요, 1580(선조 13) 임금은 정구를 창녕현감에 제수하고 또 불렀습니다. 정구가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자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고, 정구는 하는 수 없이 나아가 사은했습니다.
 
정구는 창녕 임지로 내려갔고, 각지에 서재를 설치하고 학도들을 불러다가 경의(敬義)를 강학했습니다. 효자와 열녀 정문을 새롭게 수리하고 향사례와 향음주례, 양로례를 행했는데요, 이것이 정구의 첫 관직생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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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38세에 첫 벼슬길에 나아간 후 여러 직을 역임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직했고, 임금이 벼슬에 제수하고 불러도 사양하다가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면 마지못해 부임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향촌에 내려와서 지낼 때마다 회연초당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강석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장계향의 친정아버지 장흥효를 비롯하여 허목, 황종해, 송원기, 손처눌, 한준겸, 문위, 서사원, 이윤우 등의 쟁쟁한 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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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선조 24)에도 임금은 향리에 돌아가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정구를 통천군수에 제수하고 부릅니다. 정구는 이번에도 여러 번 사양하다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임금의 비답에 어쩔 수 없이 나아가 사은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정구는 의병을 모집해 관군과 합치고 왜적과 싸웠습니다.
 
이때 임금의 형인 하릉군 이인(李鏻)이 정구의 관할지인 통천으로 피란을 가 있었는데요, 왜적이 통천까지 들어오자 왜적에 잡혀 욕을 당할까봐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전란 중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목을 맸으므로 그 유해를 찾을 수 없었는데, 정구는 이듬해에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간 후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나섰고, 어렵게 찾아서 상사를 치를 수 있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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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은 여전히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었다. 정구는 당상관인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강릉부사로 옮겨갔고, 전쟁으로 피해 입은 백성들을 보살폈습니다.
 
정구는 전란 중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벼슬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594년 승정원 승지에 임명돼 내직으로 돌아갔고, 이듬해 정월 우부승지, 3월에 다시 좌부승지로 승진했습니다. 고속승진이 부담스러웠던 정구는 그제야 사직을 청했는데요, 임금은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흥위호군에 제수했다가 곧 장례원판결사로 바꾸어 제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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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분위호군,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후 1596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는데요, 강원도 각지의 산성을 수축하고 식수와 양식, 갑옷을 비축해서 유사시에 백성들의 대피장소로 이용하게 했습니다. 울진의 선비 주경안이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인성대비와 인순대비, 그리고 명종의 국상 때 3년 복상을 하는 예를 갖추었으며, 전란 중에는 솔잎을 가늘게 썰어 죽에 타 마시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 매일 분향하고 3년 동안 하늘에 종전을 빌었는데, 전란 중이긴 하지만 이러한 고절은 풍화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아뢴다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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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읍지를 편찬해 고을 백성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했는데, "창산지(昌山志)" "동복지(同福志)", "함주지(咸州志)", "통천지(通川志)", "임영지(臨瀛志)", "관동지(關東志)", "충주지(忠州志)", "복주지(福州志)" 등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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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예학으로 정치를 정화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현실정치에 올바르게 적용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가 벼슬에 나아갔던 것도 이를 실현시키려는 의지였는데요, 그러나 그가 실험한 예학정치가 번번이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히자 낙심한 듯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고, 무흘곡으로 들어가 은거합니다.
 
무흘동천 시절인 1606(선조 39) 광주목사에 제수되지만 부임하지 않습니다. 1607년 안동대도호부사에 제수됐을 때도 상경해 사은숙배만 하고 사직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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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정구가 지은 무흘야영(武屹夜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봉우리 위로 지는 달 시냇물에 어리는데(峯頭殘月點寒溪)
아무도 없이 홀로 앉았노라니 밤기운 싸늘하다(獨坐無人夜氣凄)
위해주는 건 고마우나 벗님들, 찾아올 생각 말게(爲謝親朋休理屐)
짙은 구름 쌓인 눈에 오솔길 묻혔으니(亂雲層雪逕全迷)
 
라고 했는데요.
짙은 구름 쌓인 눈에 묻힌 것은 오솔길이 아니라 정구 자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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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에 왕위에 오른 광해임금은,
 
정구는 산림의 어진 선비로서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예우하셨던 인물이다. 지금 마땅한 상규를 따지지 말고 우선 발탁해 써서 덕이 없고 식견이 어두운 나의 자문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원자를 보좌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라.”
 
하고 전교하고 특별히 정구를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에 제수하여 국정 자문을 구하고 원자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임해군은 역모를 의심받게 되는데요, 그러자 정구는 인의(仁義)에 의지하여 선처를 청하는 내용의 상소를 수차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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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이 스스로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지어 성상께 크나큰 근심과 슬픔을 끼쳤으니, 신은 이 때문에 심장이 썩고 창자가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은혜로운 사랑과 도리를 참작한다면 임시변통으로 잘 처리할 수 있는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 길은 전하께서 오로지 공도(公道)에 따라 법을 적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고, 의리를 깊이 생각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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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인데요, 그러나 광해임금이 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정구는 세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상소에 답하는 대신 정구를 형조참판으로 전임시켰는데요, 그러자 정구는 병이 났다 핑계대고 외지로 나가서 출사하지 않으며 상서(上書)로 사직을 청했습니다. 이에 임금은 매우 서운하다고 하며 마침내 사직을 윤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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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한 정구는 다시 무흘동천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게 되는데요, 세상과 연을 끊고 무흘곡에 숨어 지내다가 1612년 칠곡의 노곡에 사양정사를 짓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 관련 계축옥사가 일어납니다.
 
정구는 영창대군을 구하려고 상경하려 했지만 영동까지 가서 병이 나고 말았는데요, 그러자 정구는 "춘추"를 인용하며 만언소(萬言疏)를 지었고, 그것을 아들 정장에게 들려서 한양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정장은 아버지가 화를 당할까 싶어서 상소문을 숨기고 조정에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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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상소했고, 또 했습니다. 당시의 실세인 정인홍이 해치려 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상소했지만 어린 영창대군은 결국 서인으로 강등돼서 강화에 위리안치 됐습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죽임을 당한 1614, 정구의 사양정사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서 정구가 저술해놓은 많은 서적이 잿더미가 됐습니다.
 
정구는 성주 백매원(百梅園)으로 거처를 옮겼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하며 지내다가 1620년 정월 7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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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요, 성주의 회연서원과 천곡서원, 통천의 경덕사, 충주의 운곡서원, 칠곡 사양서원, 창녕 관산서원, 창원의 회원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등에 제향됐습니다.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에 묘소가 있고, 수륜면 동한강로에 신도비가 있으며, 김천시 대덕면 가례리에 기념비가 있습니다. 성주군 수륜면에 1591년 정구가 지은 모옥사숙(지금의 사창서당)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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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심경발휘"와 정구의 심학(추제협), 한강 정구의 예론과 예설(박종천,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한강 정구의 현실인식과 경세관(김무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강 정구의 유거공간과 "무흘구곡도"(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한국미술사 전공), "기언(記言)"(허목 저, 김민선 역, 한국고전번역원), "한강집"(정구 저, 송기채 역, 한국고전번역원), "남인예학의 선구 정구"(윤천근 저, 한국국학진흥원, 2009,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