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보낸 장수, 정기룡
정기룡 장군은 당시의 사람들이 ‘신이 보낸 장수’라는 뜻의 신장(神將), 즉 신이 보낸 군사를 거느린 장수라고 평가했는데요.
정기룡 장군이 어떤 분이고 어떤 활약을 펼쳤기에 ‘신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걸까요?
소설가 성석제 님은 저의 장편역사소설 “신이 보낸 장수, 정기룡”의 추천사에서,
내 고향 상주에서 정기룡 장군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명장(名將)이자 용장(勇將)이다. 상주 경천대에는 용이 변신한 천리준마를 탄 장군이 낙동강 푸른 물결을 응시하고 있다. 상주의 옛 이름이 상산이니,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이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으로 화신(化身)하여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라고 말하셨는데요,
정기룡은 선조 연간, 그리고 광해군 연간에 활동한 무장입니다. 선조 연간이라고 하면 당연히 임진왜란 때 활동한 장수였겠죠? 정기룡의 초명이 정무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 선조임금의 꿈에 용이 나타났고, 꿈속의 용이 승천한 장소 종루에 정기룡이 자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선조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그에게 기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정기룡은 임진왜란에서 6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없이 모두 이긴 장수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기룡은 경상우도, 즉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우병영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각 지역에 영군과 진군 등이 있었으며, 각 관아에는 관군과 성을 지키는 성병 등이 있어서 매우 복잡했습니다. 영군과 진군은 정규군에 해당했고, 따라서 영군은 병마절도사가, 진군은 첨절제사가 거느렸습니다.
그리고 관군의 경우 외침이나 반란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조정에서 순찰사, 순변사, 방어사 등을 임명해 내려 보내서 관군을 합쳐 거느리고 지휘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보면, 경주판관 박의장이나 곤양군수 이광악 같은 경우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찰사나 순변사, 방어사 등의 간섭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또 의병장들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를 거느린 지방관의 경우 옛날의 호족이 거느린 군사처럼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작전을 수행했다는 뜻이겠지요.
정기룡 장군의 경우도 큰 전투는 상급기관 지휘관인 도체찰사나 도원수의 지휘를 받긴 했지만 대부분의 왜적 토벌은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1586년 무과에 급제한 후 동북육진으로 불리는 지금의 함경북도에서 무관으로 봉직했고, 1590년에 고향인 경상우병영으로 옮겨서 당시의 병마절도사인 신립 장군 휘하에서 근무했으며, 이듬해인 1591년엔 훈련원으로 자리를 옮겨 봉사로 봉직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1592년이므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훈련원봉사였는데요, 당시 조정에서는 추풍령 방어의 임무를 맡겨서 조경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경상우도로 급파했죠. 그때 정기룡은 자진해서 조경을 찾아갔고, 조경 휘하의 돌격별장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정기룡은 신창, 지금의 거창군 웅양면에서 처음 왜적과 맞닥뜨리고 전투를 벌여서 이기는데요,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선군이 이긴 첫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수급을 베지 않아서 그 전공을 인정받지 못했는데요, 정기룡은 수급을 베어서 승리를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김천역전투가 있었고, 바로 이어진 추풍령전투에서 방어사 조경이 왜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정기룡은 돌격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조경을 구출을 해옵니다.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며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요,
조정에서 정기룡의 무재를 알아보고 감사군, 즉 죽기를 맹세한 특수부대 대장에 임명하여 특수임무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감사군대장에 임명된 것은 분명함에도 그 활동에 관한 기록은 없는데요, 그것은 공식적으로 기록할 수 없는 비밀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 후 상주성을 탈환하라는 특령을 받고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유군장으로써 상주 임시판관에 임명되어 자신의 군사 5백을 거느리고 상주로 급파되고, 상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 약 3백여 명, 그리고 관병연합군 약 1백여 명과 함께, 당시 왜적에 빼앗긴 군사요충지 상주성 탈환을 도모합니다.
당시 상주성에는 2천5백이 넘는 왜적이 지키고 있었고, 정기룡이 상주로 급파되자 약 1천여 명의 왜병이 추가로 투입됐는데요, 정기룡의 군사는 의병과 관병연합까지 합쳐야 겨우 9백 가량이었습니다. 정기룡 유군장 겸 임시판관은 곳곳에서 노략질에 나선 왜적과 싸워 이기고 무기를 확보하여 의병을 무장시킨 다음 한겨울 왜적을 추위에 떨게 만들어서 몸을 병들게 한 후 벼락 같이 쳐서 단번에 상주성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야지에서 싹 쓸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왜적을 피해 곳곳으로 피난했던 백성들이 정기룡의 보호를 받기 위해 상주성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상주성 탈환은 전략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컸습니다. 당시 왜적은 평양성까지 진주해 있었는데요, 상주성 탈환으로 왜국 본토와의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최전선의 왜적은 조총과 대조총 탄환과 화약을 보급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작전이 개시됐고, 평양성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대대적 반격이 개시되는데요, 만일 이때 정기룡 장군이 상주성을 탈환하지 않았다면 왜적이 그처럼 쉽게 평양성을 내주고 한밤중에 도주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 왜적이 한양성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퇴각하게 되고, 조선은 한양을 수복하는데요, 이때 정기룡은 경상우도의 28개군 관병을 거느리는 토왜대장, 즉 왜적토벌군 대장 겸 정식 상주목사에 임명되고, 왜적을 다 토벌한 후에는 토적을 토평하라는 임무를 받고 토포사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는데, 왜적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이순신 장군이 없는 틈에 호남으로 직접 상륙하여 남원성으로 향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는 경상우도 남쪽을 통과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죠. 그러자 조명연합군은 직산, 지금의 천안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한양사수에 들어가는데요,
그런데 이때 왜장 모리 히데모토가 거느린 왜적이 경상우도를 통과하여 추풍령을 넘고 직산으로 향하려 합니다. 이때 모리 히데모토의 왜적을 막는 총책임자는 4도도체찰사인 이원익이었는데, 이원익은 경상우도의 관병을 모두 모아 고령에서 왜적의 앞을 막아섭니다. 이때 토포대장 정기룡은 그 휘하에서 왜적과 싸우게 되고, 왜적을 고령의 이동현 고개로 유인해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이에 모리 히데모토의 왜적은 감히 더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고, 직산에서도 조명연합군이 대승하여 왜적은 울산과 순천 등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이때 정기룡은 왜적의 진격을 완벽히 저지한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대행에 임명되고, 얼마 후엔 정식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는데, 이때 나이 겨우 서른여섯이었습니다.
서른여섯에 장군이 된 정기룡은 경상우도 남쪽에서 토왜를 이어갑니다. 호남으로 가서 권율의 지휘를 받으며 싸우기도 하고, 제3영 사령에 임명되어 명나라 제독 마귀의 지휘를 받으며 울산의 도산왜성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주로 경상우도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숱한 전투를 치르는데,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전투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애환도 있었습니다.
이때 정기룡과 연합작전을 펼쳤던 명나라 제독 마귀는 선조임금께,
“의협심이 대단해서 왜적을 잘 사살하니 적을 토멸할 때 손발이 잘 맞습니다.”
하고 정기룡을 칭찬했는데요, 마귀는 또 1598년, 선조 31년 8월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을 겁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뛰어난 장수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과 정기룡(鄭起龍), 한명련(韓明璉), 그리고 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정기룡 장군이 중로총병으로써 명나라 군사와 연합작전을 완벽하게 전개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정기룡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명나라군 지휘권까지 위임받아 연합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명연합군의 연합작전은 승리를 하더라도 그 전공을 명나라군이 먼저 챙겼으므로 경상우영군의 전공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는데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왜적이 진주성 앞의 들에 보리농사를 지어놓았는데, 정기룡 장군은 명군에게 그것을 빼앗아서 군량으로 쓰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는 싫다고 거절하는데요, 그러자 정기룡 장군은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밀서를 보내서 명군을 작전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조르고, 양호의 지시로 명군이 그 작전에 동참해서 왜적이 농사지은 보리를 빼앗아옵니다. 그것은 명군이 위험한 작전에 얼마나 몸을 사렸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