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9일 목요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절의그리고 거인욕(去人欲), 즉 인욕의 제거를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합니다두 사람은 동양철학계에서 최고의 성인으로 칭송받기도 하는데요,
고려삼은의 한 사람인 길재(吉再)는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 후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장군을 잡아 강화도와 고봉으로 유배하자 그들의 반역을 탄식하며,
몸은 비록 평범하여 기특한 것 없지만 뜻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다.”
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또 송시열이 유배를 떠나던 날 철령(鐵嶺)에 올라서 지었다는 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데요,
行登鐵嶺上(가다가 철령 꼭대기에 오르니)
我心堅似鐵(내 마음 쇠와 같이 굳어지도다)
雖乏器之誠(비록 모자라서 도기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却耐西山血(굳은 의지로 서산의 피를 지켜내리.)
<서산의 피>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굶어죽는 길을 택한 백이숙제의 고혈을 말하는 거겠죠?

우리가 아는 백이숙제는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엮은 󰡔사기󰡕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기록된 내용이 대부분인데요,
󰡔사기󰡕의 백이열전을 보면,
<공자가 말하기를백이와 숙제는 이미 저지른 죄악에 괘념치 않았으며,
()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나는 백이의 뜻을 가슴 아파하나니.
그들의 우수한 시를 보니 가히 진귀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 전기에 말하기를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임금의 두 아들인데
아버지는 숙제를 (임금에세우려했으나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떠나서 멀리 달아나버렸다.
숙제 또한 서기를 꺼려하여 그를 따라 달아났다.
그래서 고죽국 사람들은 가운데 아들을 세웠다.
이리하여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서백 창(西伯 昌주 문왕周 文王)이 착해서
노인을 잘 돌본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
라고 하며 주나라에 이르렀는데,
서백이 죽자 그 아들 무왕이 신주를 떠받들어 시호를 문왕이라 했다.
그리고는 동쪽 주왕(紂王은나라 마지막 왕)을 정벌하려고 했는데,
백이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전쟁하니 어찌 효자이겠으며,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겠습니까?
라고 했다좌우의 신하들이 병사를 시켜 죽이려 했는데,
강태공이 말하기를,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하고는 그들을 부축하여 그곳을 떠났다.
무왕은 그리하여 어지러운 은나라를 평정했고,
천하는 주나라에 종속되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의를 좇아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그 가사는 이러했다.
登彼西山兮(저기 서산에 올라)
采其薇矣(고사리를 캐노라.)
以暴易暴兮(폭력을 폭력으로 바꾸고도)
不知其非矣(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神農虞夏忽焉沒兮(신농과 우나라 하나라의 도()가 일시에 몰하였으니)
我安適歸矣(어디에도 우리가 의지할 곳은 없음이라.)
于嗟徂兮(탄식이 여기에 미치었으니)
命之衰矣(우리의 운명도 다하였도다.)
사마천의 󰡔사기󰡕 중 백이열전」 일부인데요,
서백 창은 주 문왕周 文王)이고동쪽 주왕(紂王)은 은나라 마지막 왕입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왕자들이었다는 내용이죠?
왕이 셋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임금이 죽자 숙제가 장자인 백이를 두고 자신이 왕에 오를 수 없다고 사양했고,
백이는 아버지의 명인데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이 방해되지 않으려 나라를 떠나 멀리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러자 숙제 또한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라도 형을 두고 왕위에 오를 순 없다며
형인 백이 뒤를 좇아가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고죽국>은 기원전 664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인데요,
풍몽룡이 지은 󰡔동주 열국지󰡕에 보면 제환공(齊桓公)이 연나라를 앞세우고 고죽국을
치러 가는 얘기가 나오죠그러나 고죽국 대장군 황하에게 속아서 한해(瀚海사막으로 들어서게 되고모래폭풍에 군사를 모두 잃고 허망하게 돌아오게 되는데요.
그런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를 보니,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校勘 周以封箕子爲朝鮮.>
당나라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인데 주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고려>는 고구려를 말하는 건데요,
중국 수나라 정사인 󰡔수서(隋書)󰡕 67에 배구전이 있습니다배구전을 살펴보니,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고려지지 본고죽국야 주대이지봉우기자>
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일연의 󰡔삼국유사󰡕와 그 내용이 일치하죠?

조선 중기의 문인 최립의 시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에서 차운하다>
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데요,
餓死西山不自悲(서산에서 굶어 죽어도 혼자 슬프지는 않았으리.)
千秋慕義寄高祠(그 드높은 의로움을 영원히 기려 사당에 모셨음이라)
隔河孤竹君靈在(강 건너에 고죽군의 영령을 또 모셨나니)
長有淸風來往吹(맑은 바람 끊임없이 불어 오가리)
수양산에서 산나물을 뜯으며 연명하다 돌아가신 두 분의 영령을 모셔서 사당을 세우고
백이숙제 두 분의 아버지인 고죽군 또한 사당에 모셨다는 내용이 보이는데요,
최립이 백이숙제의 사당에서 지은 시겠지요?
󰡔승정원일기󰡕를 보니 고종 7년 2월 19일 기사에,
임금이 말하기를,
백이 무덤이 중국에 있다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있다 하기도 하는데 어째서인가?”
하니 ()성교(趙性敎)가 아뢰기를,
신이 몇 년 전 사신으로 갔을 때 고죽성(孤竹城)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성 안에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더이다그러나 그 무덤이 있는 곳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대개 그 지방이 우리나라의 국경과 서로 가까워서 혹 그러한 이야기가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서󰡕 「배구전의 기록대로라면 고죽국은 고구려의 전신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여야 마땅할 텐데요,
어쩌면 고죽국이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거센데요,
아무리 그래 봤자 중국의 역사적 국경은 만리장성을 넘지 못합니다.
자기들 스스로 거기까지가 우리 땅이다라고 금을 그어놓았으니까요.
이상
소설가 전은강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11월 20일 화요일

노수신의 철리시, 지행합일의 이해

 
철학과 시󰡔철리시󰡕
 
 
 
안녕하십니까, 전은강입니다.
오늘은 철리시((哲理詩) 한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철리시라고 하면 철학상의 이치, 혹은 현묘(玄妙)한 이치가 스며있는 시를 말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노수신(盧守愼)이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시로 표현하면서 가장 활발히 지어졌습니다.
 
노수신은 아시다시피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이지요.

양명학파, 할 때의 양명은 왕수인(王守仁)의 호인데요, 정주학파(程朱學派)의 리학(理學)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는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을 계승하여 부응시킨 학자가 왕양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정통 리학인 정주학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발전시켰는데요,

퇴계(退溪)와 동시대에 활동한 노수신이 처음으로 양명학을 받아들여서 연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기에 노수신이 지은 철리시는 당연히 양명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겠지요? 자신의 학문적 주장, 즉 학설을 시로 읊어서 강조한 것이니까요.

노수신이 시로 양명학적 성격의 심학을 설파하자 정주학을 계승한 리학 계열의 퇴계학파, 그 중에서도 퇴계학을 좇던 기대승(奇大升)이 즉각 철리시로 반박했고, 노수신에게서 학문을 익힌 소재학파(蘇齋學派)에서 재반박에 나섰으며, 퇴계학파가 다시 받아치면서 두 학파 사이에서 철리시를 통한 철리논쟁이 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철리시가 풍성하게 지어질 수 있었는데요,
 
양명학이 심학으로 분류된 이유는, 철학적 이치를 파고드는 학문의 깊이 보다는 존심(存心), 즉 마음공부에 더 치중했기 때문인데요, 그렇지만 심학 또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리학과 다르지 않으므로 크게 보면 성리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수신은 아시겠지만 양재역벽서사건의 배후라는 누명을 쓰고 옥주(沃州), 지금의 진도로 유배됐고, 20여 년간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면서 학문연구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새 임금 선조가 즉위하면서 풀려나 부제학에 서용됐고, 선조 7년엔 우의정에 올라 경연(經筵)에도 참석하고 있었는데요,
 
노수신은 선조 7428일 경연에서,
 
()와 행()은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주자가 분별하여 말을 했고, 세상의 유자들이 두 가지 일로 명백히 여기니,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한 것인데요,
지행합일설은 양명의 학설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요,
양명은
 
아는 것, 즉 지()는 행()의 완성이다. 따라서 지()와 행()은 둘이 아니라 본래 하나다.”
라고 주장했지요.
지행을 합일시켜야 실천이 강화되어 치양지(致良知)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요, 누구나 도리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아서 문제이니 앎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자(朱子)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지요? 먼저 이치, 즉 리()를 깨우친 후 실천을 해야 보다 완전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경연이라고 하면 임금 앞에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말하죠?
그렇기에 아무나 참석할 수 없고 최고의 학문 경지에 이른 신하들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요,
노수신은 경연에서 양명의 학설을 설파하자 주자학을 좇던 유희춘(柳希春)이 즉각 반박합니다.
 
"대강 알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취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
 
(정자는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하는 거죠?)
 
정자의 말에,
비유한다면 길을 갈 때 모름지기 먼저 하나의 빛을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낮의 햇빛과 밤의 불빛을 얻어야 바야흐로 밟을 곳을 알 수 있어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를 논한다면 지()가 먼저가 되고 경중을 논한다면 행()이 중점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성리학은 아주 작은 차이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요,
그것은 작은 차이가 큰 시행착오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를 경계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유명하다는 철학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요,
그분이 말하기를 <자기가 사건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더군요.
자기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사랑해야지요. 우리는 모두 부모에 의지하여 세상에 오긴 했지만 누구랑 같이 오지는 않았기에 혼자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지만 또다른 내가 존재하지는 않기에 <>라는 존재 자체는 혼자라는 얘깁니다. 그 혼자를 내가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참으로 가엾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는 반드시 이기심에 대한 경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함에 있어 자기 사랑이 지나치면, 다시 말해 이기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고, 결국은 세상의 왕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의 철학교수는 <자기사랑>만 강조하고 이기심에 대한 경계는 말하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그는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오류를 범한 것이지요. 나에게 사건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라고 하면서도 이기심에 대한 경계를 빠뜨림으로써 세상의 왕따가 되라고 권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철학에서 그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를 간과한 것이지요.
 
 
 
각설하고요,
이쯤에서 노수신의 철리시를 한 편 볼까요?
 
 
 
元來道與器非隣(원래도여기비린)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可認人心是外塵(가인인심시외진)
인심을 외진(外塵: ·····)으로 볼 수 있겠는가
 
須就道心爲大本(수취도심위대본)
모름지기 도심은 대본이 되고
 
用時還見道乘人(용시환견도승인)
()이자 정()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할 때의 기는 그릇 기()? 길 도, 그릇 기의 도기(道器)에서
()는 형이상의 무형적 도리이고,
(그릇)는 형이하의 유형적 사물을 뜻하는데요,
형이상학적 도리를 담고 있는 그릇,
다시 말해 도리를 실행하는 구체적 물질,
즉 눈(), (), (), (), (), 의미()의 육근이 그것이겠죠?
육근이 있어야 도리를 실행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라는 말은 도리를 실천하는 구체적 물질이 도(), 즉 천리(天理)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감정 외적인 것이 기이므로 육근에 의해 실행되는 외진外塵, 즉 색·····법의 육진도 천리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도는 도를 담고 있는 그릇, 즉 육근에 의해 실행되므로 마음과 육체도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리()와 기()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요.
 
 
(여기서 성정, 리기, 도심과 인심, 체용 등의 용어가 난무하는데요,
작은 차이들이 있지만 잘 모르겠으면 크게 <천리와 그 현상>이라고 이해하고 구체적 차이는 나중에 배워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혹은 <마음과 정신>으로 정리해도 쉬울 거고요.)
 
 
양명의 지행합일설이 성립하려면 리기(理氣)와 성정(性情)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와 기()도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는 천리(天理)이고,
()은 천리에 따른 실천이니까요.
 
그러므로 지, 즉 아는 것은 리와 성, 그리고 도에 해당하고,
, 즉 실천은 기()와 정, 그리고 그릇 기를 쓰는 기()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지행합일은 천리와 그 실천이 하나여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노수신은 도와 기가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문제냐 하면 말이죠,
 
 
()는 천리(天理), 즉 하늘의 바른 이치를 뜻하고, ()는 그에 따른 현상을 말하죠?
 
성리학의 절대명제는
<천리(天理)의 보존, 인욕(人慾)의 제거>에 있거든요.
 
불가에서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보고 아예 욕망을 제거하지만
성리학에서는 욕심 때문에 마음이 오염된다고 보기에 욕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데요,
 
리는 천리고 기는 그에 따른 현상이기에 인의예지의 사단은 리이고,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은 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보존하고 칠정 중에서 욕심은 제거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리기가 분리되지 않으면 천리와 함께 인욕도 보존해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겠죠?
 
욕심, 그 중에서도 이기적 사사로운 욕심, 즉 탐욕까지 제거하지 않아야 한다니, 성리학의 명제 자체를 거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可認人心是外塵(가인인심시외진)
인심을 외진(外塵: ·····)으로 볼 수 있겠는가
 
 
2행의 이 부분에서는 인심을 외진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외진은 색과 소리, 향기와 맛, 감촉과 법의 6진을 뜻하죠? 마음 바깥의 대상물질로 인하여 생기는 분별의식을 말하는데요,
 
도심(道心), 즉 본연지성의 반대개념인 인심(人心), 즉 기질지성은 정(), 즉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이죠?
그런데 노수신은 이 칠정을 외진으로 볼 수 없으므로 도와 기()는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군요.
그렇습니다. 분명 색과 소리, 향기와 맛, 감촉은 감정이 아니죠.
인심이 외진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적 무형의 도리와 형이하학적 유형의 사물인 기()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다음 연으로 넘어가서,
 
 
須就道心爲大本(수취도심위대본)
모름지기 도심은 대본이 되고
 
用時還見道乘人(용시환견도승인)
()이자 정()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노수신은 3연과 4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는데요,
 
 
어쨌거나 노수신은 도심이 대본(大本)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자 정()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라고 하여
 
도심은 형기를 타고 인심으로 드러날 뿐이며, 인심은 인욕과는 다른 것으로, 본성인 도심이 발한 것이 인심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리가 발한 것이 기이고,
()이자 성()인 도심이 발한 것이 인심이며, 천리(天理)인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리와 기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인의예지의 사단과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 또한 분리되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사단은 성(), 즉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인 천명이고
칠정(七情)을 정(), 즉 마음이 외물을 접하였을 때 표출하는 인지적·정서적 반응이라는 정의 또한 성립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칠정 중에 포함되어 있는 욕심은 제거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되고,
 
따라서 <천리는 보존하고 인욕은 제거하라>는 주자의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의 명제를 통째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때문에 리기와 도기, 체용(體用), 성정(性情)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양명의 주장은 정주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학설이었죠.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