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주소:
https://www.youtube.com/channel/UCqDuGGYmWvFOK-K1fy8P-DA
https://www.youtube.com/channel/UCqDuGGYmWvFOK-K1fy8P-DA
김종직의 「조의제문」
「무오사화(戊午史禍)」,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죠? 바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인데요, 도대체 어떤 글이기에 그토록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일까요?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엄청난 화를 입은 사건인데요,
훈구파라고 하면 공신세력을 일컫는 말이죠? 반면 신진사류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학통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 이후 등장한 사학(私學) 출신 중심의 사림파(士林派)를 일컫는 말이고요.
당시의 대표적 훈구파로는 류자광(柳子光),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이극돈(李克墩) 등이 있었고요,
신진사류 사림파는 대부분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는데요, 조위(曺偉),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최보(崔潽), 김굉필(金宏弼), 강백진(康伯珍), 강혼(姜渾), 강겸(姜謙), 표연말(表沿沫), 정여창(鄭汝昌) 등이 있었습니다.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을 일컬어 사람들은 흔히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라고 하죠?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고려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제자였고, 김종직이 그 학통을 계승했으므로 영남도학은 김종직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년)에 태어나서 1492년(성종 2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영남학파 종조로서 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그 중에서도, 관학에 맞서 사학을 크게 부흥시키고 그 제자들을 관직에 많이 진출시켰다는 점을 특히 높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에 공을 세운 정난공신, 좌익공신, 적개공신, 익대공신 등의 훈신과 그 후손, 척신 등의 훈구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는데요,
자기들끼리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사학(私學)을 억압하고 관학 위주로만 인재를 키우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훈신세력은 왕족 교육기관인 종학(宗學)과 나라가 한양 네 곳에 세운 중학(中學), 동학(東學), 남학(南學), 서학(西學). 그리고 성균관과 지방향교 등의 관학에 교수와 훈도를 파견함으로써 조정의 통제 하에 두고는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재만 골라서 키우고 또 그렇게 골라서 등용하고 있었죠.
그런 때에 김종직이 사학을 열고 많은 학자들을 길러서 관직에 진출시킴으로써 관학독점을 깨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해온 훈구세력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사실 「무오사화」는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훈구세력의 그 저항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화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선대 왕 성종(재위 1469∼1494)이 김종직 제자 조위(曺偉)와 정석견(鄭錫堅)에게 명해서 엮은 「김종직 문집」을 사초(史草)에 실었습니다. 그 문집에는 「조의제문」, 그리고 도연명의 시 「술주(述酒)」에 대한 김종직의 화답 시인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 등이 들어 있었지요,
김일손은 다른 한편으로는 또 훈구파의 비리 관련 문서도 사초에 실었는데요, 그 중에는 실록청(實錄廳) 당상관인 이극돈(李克墩)이 성종 상중에 기생과 어울렸다는 비위 기록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실록에 실을 사초를 검토하던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은 자신을 비롯한 훈구파의 비리 관련 사초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고, 김일손을 불러서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손은 매우 강직한 학자였고,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습니다.
아무리 실록청 당상관이라도 사초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김일손이 그것을 문제 삼으면 탄핵을 받게 될 테니까요. 고민 끝에 이극돈은 노사신과 윤필상 등을 찾아가서 그 문제를 의논하는데요, 김일손이 올린 사초에 그들의 비리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의논 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단종(端宗)을 죽인 세조(世祖)를 항우(項羽)에 빗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내용이라는 세간의 얘기가 있다. 그것을 문제 삼겠다고 하면 김일손도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김일손이 그런 불온한 내용인 것을 알면서도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다면 불경죄에 해당하니 그것으로 협박하면 김일손이 겁을 먹고 자신들의 비위 관련 사초를 빼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김일손은 「조의제문」은 그런 불온한 글이 아니라며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습니다.
이극돈과 노사신 등은 김일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자 류자광을 찾아가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아주 불온한 글이라고 일러바치게 되는데요,
왜 굳이 류자광이었을까요?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頭滿江波飮馬無-두만강파음마무(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
이 시는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장군(1441~1468)의 「북정가(北征歌)」입니다. 예종(睿宗) 1년, 병조참지이던 류자광은 남이장군의 「북정가」에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조작하고는 남이장군이 역모를 꾸민다고 소문을 냈는데요,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
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바뀌면,
남아가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이라는 내용은
남아가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이라는 내용으로 바뀌겠지요. 류자광이 그렇게 조작한 「북정가」를 읽은 사람들은 남이장군이 나라를 훔치려는 뜻을 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류자광은 일단 사람들이 남이장군을 의심하도록 분위기를 잡은 후 당시의 임금인 예종을 알현하고는,
남이가 신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주상이 선전관을 시켜 재상의 집에 분경(奔競)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므로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오. 수강궁(壽康宮)은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이라야 가하오.’
라고 하더이다.
하고 남이장군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을 아뢰었는데요,
남이장군은 결국 역모죄 누명을 쓰고 거열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종직은 그런 비열한 류자광을 매우 미워해서, 자신이 함양군수에 부임했을 때는 함양관아에 걸린 류자광의 현판을 보고 당장 떼어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류자광 또한 김종직을 미워했던 것이지요.
류자광은, 이미 죽은 김종직이지만 이제라도 예전의 수모를 앙갚음할 기회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밉니다. 그런 다음 연산군에게 달려가서,
김일손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한다고 아뢨습니다. 「조의제문」이 초의제(楚義帝)를 조상하는 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초의제를 폐위하고 황위(皇位)를 찬탈한 항우에 빗대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했을 뿐 아니라,
세조가 사람을 시켜서 단종을 죽이고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고 비난하는 내용인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세조의 정통성을 훼손하려고 그 글을 실록에 실으려 한다고 말이지요.
류자광은 또, 김일손이 정몽주(鄭夢周) 격살사건도 사초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김종직의 유언에 따라 김종직의 제자들이 뭉쳐 고려를 복구하려는 음모라고도 무함했습니다.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인데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역적으로 규정되면 그 혈통을 계승한 연산군도 그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겠죠? 거기에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신진사류가 조선 자체를 부정하고 고려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숨기고 있다니 더욱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연산군은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즉시 김일손을 잡아들이라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류자광이 책임지고 김일손 사초사건을 조사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김종직 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의 「점필재집무오사적(佔畢齋集戊午事蹟)」 편에 보니,
<우재기사종직조의제문(又載其師宗直吊義帝文)>이라는 글자가 보이는군요.
점필재는 김종직의 호인데요,
<우재기사종직조의제문>은 <스승 김종직의 그 조의제문을 거듭 싣다>라는 뜻이겠지요, 조(吊)는 <상조할 조> 자이니 <조상할 조(弔)> 자와 같이 쓰입니다.
「조의제문」이라 함은, <의제를 조상하는 글>이라는 말인데요,
중국 진나라 때 유방(刘邦)과 천하 패권을 다투던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가 자신의 황제인 초(楚)나라 회왕(懷王) 초의제(楚義帝)를 도읍인 침성(郴城)에서 내쫓고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등을 시켜서 죽이게 한 일이 있었고, 결국 초의제는 침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데요,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끝내 동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단종과 그 상황이 비슷하죠?
그 초의제를 조상한 김종직의 글이 「조의제문」입니다.
丁丑十月日 (정축시월일) 정축 10월의 어느 하루
余自密城道京山 (여자밀성도경산) 내가 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밀성은 지금의 밀양을 말하고요, 서울 경 자를 쓰는 경산은 옛 경산부京山府를 말하는데요, 지금의 성주군입니다.
宿踏溪驛 (숙답계역) 답계역에서 자게 됐는데
답계역은 지금의 성주군 학산리(鶴山里)입니다.
夢有神人被七章之服(몽유신인피칠장지복) 꿈에 칠장옷을 입은 신이
칠장은 황제와 제후를 상징하는 문양이 수놓아진 곤복이죠.
頎然而來 (기연이래) 기연히 나타나서
自言(자언)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爲 (초회왕손심위)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인데
<나는>이라는 주어가 빠졌죠?
송나라 강지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간추려 엮은 통감절요(通鑑節要)의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편 주석을 보니 <心은 이름이며, 초나라 회왕 괴(槐)의 손자이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爲西楚伯王項籍所弑 (위서초백왕항적소시)
서초패왕 항적(項籍)에게 살해 되어서
여기서는 주어, 즉 <우리 할아버지 회왕은>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초패왕 항적은 항우를 말함이죠?
沉之郴江因忽不見 (침지침강 인홀불견) 침강(郴江)에 잠겼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余覺之 愕然曰 (여각지 악연왈) 내가 꿈에서 깨어 아연실색하며 말하기를
懷王南楚之人也 (회왕남초지인야) 회왕은 남초 사람이고
회왕 초의제는 남초의제(南楚義帝)로도 불렸죠?
余則東夷之人也 (여칙동이지인야) 나는 동이 사람이라
地之相去不翅萬有餘里(지지상거 불시만유여리)땅의 거리는 무려 만여 리나 차이 나고
世之先後 亦千有餘載 (세지선후 역천유여재) 선후 세대 역시 천 년이 지났는데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래감우몽매 자하상야) 꿈속에 나타나 감응하니 어찌 상스럽지 않으랴.
且考之史 無投江之語 (차고지사 무투강지어) 다시 역사를 되짚어 봐도 (회왕이)강에 던져졌다는 말은 없으니
(세상에는 회왕이 죽임의 위기가 닥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尸于水歟(기우사인밀격 이투기시우수여) 그렇다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격살하고 그 시신을 물에 던졌다는 것인가!
(단종도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죠? 그래서 「조의제문」은 세조가 사람을 시켜서 단종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강물에 던진 것으로 의심하는 내용의 글이라고 본 겁니다.)
是未可知也(시미가지야) 그것은 알 수 없다, 하고
遂爲文以吊之 (수위문이조지) 드디어 글로써 조의를 표하였음이라.
(여기까지는 조문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이제부터 나오는 내용이 본 조문입니다.)
惟天賦物則 以予人兮(유천부물칙 이여인혜)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정하고 사람에게 부여하였으니!
孰不知其遵 四大與五常(숙불지기준 사대여오상)
어느 누가 사대, 즉 천(天), 지(地), 군(君), 부(父)와 오상,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엄중히 떠받들지 않으리.
匪華豊而夷嗇兮(비화풍이이색혜) 그것은 중국이라고 풍부하고 오랑캐라고 인색한 것이 아닐지니
曷古有而今亡(갈고유이금망) 어찌 옛날엔 있고 지금은 없다 하겠는가!
(하늘이 내린 만물의 법칙, 즉 사대와 오상을 말하는 거죠?)
故吾夷人 又後千祀兮(고오이인 우후천사혜)
그런 까닭에 나는 오랑캐 사람이지만 거듭 천년의 길고 긴 세월 지나
恭吊楚之懷王(공조초지회왕)
공손히 초나라 회왕에게 조의를 표하노라.
昔祖龍之弄牙角兮(석조룡지롱아각혜)
옛날에 조룡이 아각을 농락하니
四海之波 殷爲衁(사해지파 은위황)
사해 바다 물결이 핏빛으로 물들었도다.
(조룡은 무엇을 뜻할까요? 중국에 독교낙아각(毒蛟-교룡교 落牙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나라의 검사(劍士), 즉 검객 차비(佽飛)라는 사람이 강을 건너는데 독교룡(毒蛟龍), 교룡 전설 속에 나오는 뱀처럼 생긴 동물인데요, 독교룡 두 마리가 배를 습격하자 그 목을 베고 물결을 잠잠하게 했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전설의 용을 이야기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雖鱣鮪鰍鯢 曷自保兮(수전유추예 갈자보혜)
비록 전유와 추예라도 어찌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리.
(전유는 다랑어를 뜻하는데요, 김종직은 두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국학자료원의 한시어사전을 보니 두보의 「우관타어(又觀打魚)」라는 글에
<日暮蛟龍改窟穴 山根鱣鮪隨雲雷(일모교룡개굴혈 산근전유수운뢰)>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해 저물면 교룡은 소굴을 바꾸고, 산 밑의 전유는 구름과 우뢰를 따라가네.
라는 뜻입니다. 해가 저물면 교룡은 소굴을 바꾸어 자신을 보호하고, 다랑어는 구름과 우뢰를 따라가며 자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추예는 암컷고래를 뜻하는 경예(鯨鯢)의 오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수전유추예 갈자보혜>는 <비록 다랑어와 고래라도 어찌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죠?
思網漏以營營(사망루이영영)
그물에서 벗어날 생각에만 급급했으니
時六國之遺祚兮(시륙국지유조혜)
그때 육국 제후의 후손들은
沉淪播越 僅媲夫編氓(침륜파월 근비부편맹)
숨고 도망쳐서 겨우 서민과 짝을 맺었다네.
(옛날에 초나라가 그렇게 망했다는 얘기겠죠?)
梁也南國之將種兮(량야남국지장종혜)
항량은 남쪽 나라 장군집안 자손으로
踵魚狐而起事(종어호이기사)
어호를 좇아 대사를 일으켰도다.
(항량은 항우의 숙부이며, 초나라 왕족인 옹심을 찾아내서 초회왕에 추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호>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물고기 어(漁) 여우 호(狐)인데요,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편 <어호>에 대한 주해를 보니,
<진(秦)나라의 수졸(戍卒)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군사의 마음을 선동하기 위한 술책으로 비단에다, “진승이 왕이 된다.”고 글을 써서 물고기 뱃속에 넣어 사람을 시켜서 그 물고기를 팔게 하였고, 또 밤에 오광이 숲속의 신사(神祠)에 몰래 들어가서 여우의 소리로, “진승이 왕이 된다.”고 울었다.>
라고 되어 있네요. <진승과 오광의 계책>, 즉 물고기와 여우를 이용한 꾀가 <어호>겠죠?
求得王而從民望兮(구득왕이종민망혜)
덕을 구하는 임금은 백성의 소망에 따르나니
存熊繹於不祀(존웅역어불사)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잇게 했음이라.
(웅역은 주나라 성왕에 의해 처음으로 초나라 제후에 봉해진 사람인데요,
주성왕이 덕을 숭상하는 성군(聖君)이었으므로 초나라 백성의 소망을 존중하여 웅역을 초나라 첫 제후에 봉했다는 뜻입니다.)
握乾符而面陽兮(악건부이면양혜)
제왕의 부서를 받아 임금에 올랐으니
天下固無尊於芊氏(천하고무존어천씨)
천하에 초나라 천 씨보다 굳세고 존귀한 성 있었으랴!
(<그 피를 물려받은 초회왕이>라는 말이 생략된 거겠죠?)
遣長者以入關兮(견장자이입관혜)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게 하였으니
(장자는 유방을 일컫는 말이고, 관중은 지금의 중국 산시성입니다. 당시에는 진나라 땅이었는데요, 유방이 초회왕의 명을 받들고 진나라로 가서 관중을 평정했습니다. 그 일을 말하고 있는데요)
亦有足覩其仁義(역유족도기인의)
이 역시 인의라 하기에 족함이라.
(<이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한 일이었다> 라는 뜻이겠죠?)
羊狠狼貪擅 夷冠軍兮(양한랑탐천 이관군혜)
사나운 양이 낭탐(狼貪)을 부려 멋대로 관군을 멸하였구나!
(이 부분 역시 앞쪽에 <유방은 그렇듯 인의에 따랐건만 항우란 자는 그렇지 않구나>라는 말을 붙여서 읽어야겠네요.
낭탐은 배가 불러도 계속 욕심을 부리는 이리의 탐욕을 뜻하고, 관군은 초회왕의 상장군인 송의(宋義)를 뜻하는데요,
송의는 항우에게 살해당하고 그 집안이 멸족되었거든요. 항우를 낭탐을 가진 사나운 양에 비유한 거겠죠?
胡不收以 膏齊斧(호불수이고제부)
어찌 그 되놈을 잡아다가 질서의 도끼에 기름칠을 하지 않았는가!
(제부, 즉 질서의 도끼는 법의 심판을 뜻하는 말이겠죠? 기름칠은 알아서 해석하시고요.)
嗚呼(오호)
勢有大不然者兮 (세유대불연자혜)
큰 세도의 불연자여!
吾於王而益懼 (오어왕이익구)
우리의 왕을 더욱 두려워하게 하소서!
爲醢腊於反噬兮 (위해석어반서혜)
무고를 당하여 젓갈과 포육이 되었으니
(항우에게 살해된 송의를 두고 하는 말이겠죠?)
果天運之蹠盭(과천운지척려)
과연 천운의 버림을 받고 만 것인가!
郴之山磝以觸天兮 (침지산오이촉천혜)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로 솟았는데
景晻曖而向晏(경엄애이향안)
해그림자 지는 저녁으로 향하네.
郴之水流以日夜兮 (침지수류이일야혜)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흐르고
波淫泆而不返 (파음일이불반)
넘실넘실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天長地久恨其曷旣兮(천장지구한기갈기혜)
장구한 천지에 그 한 어찌 다하지 않고
魂至今猶飄蕩 (혼지금유표탕)
그 넋이 지금까지도 정처 없이 흩어져 떠돌다가
余之心貫于金石兮 (여지심관우금석혜)
나의 금석 같은 마음을 뚫고 들어와
王忽臨乎夢想 (왕홀임호몽상)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셨도다.
循紫陽之老筆兮 (순자양지노필혜)
휘도는 자양의 노련한 필체인가!
(자양은 후한 말의 진강 사람 채화의 별명입니다.)
思螴蜳以欽欽 (사진윤이흠흠)
생각을 진돈하여 몸가짐을 삼가하고
擧雲罍以酹地兮 (거운뇌이뇌지혜)
술잔을 들어 땅에 붓나니
冀英靈之來歆 (기영령지래흠)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제사의 예를 누리소서.
이상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입니다.
사초사건 조사 책임을 맡은 류자광은 어명을 받들고 김종직의 제자들 대부분을 잡아들여 국문(鞠問)하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서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 관노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김종직의 유골을 파서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했습니다.
바로 무오사화인데요, 이 사화로 사학 출신 신진사류는 씨가 말라버리고 관학 출신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훈구파 세상이 되었지요.
참고: 한시어사전(2007, 7, 9. 국학자료원), 한국고전종합DB(한국고전번역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