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시- 철리시
안녕하십니까, 전은강입니다.
오늘은 철리시((哲理詩) 한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철리시라고 하면 철학상의 이치, 혹은 현묘(玄妙)한 이치가 스며있는 시를 말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노수신(盧守愼)이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시로 표현하면서 가장 활발히 지어졌습니다.
노수신은 아시다시피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이지요.
양명학파, 할 때의 양명은 왕수인(王守仁)의 호인데요, 정주학파(程朱學派)의 리학(理學)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는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을 계승하여 부응시킨 학자가 왕양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정통 리학인 정주학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발전시켰는데요,
퇴계(退溪)와 동시대에 활동한 노수신이 처음으로 양명학을 받아들여서 연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기에 노수신이 지은 철리시는 당연히 양명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겠지요? 자신의 학문적 주장, 즉 학설을 시로 읊어서 강조한 것이니까요.
노수신이 시로 양명학적 성격의 심학을 설파하자 정주학을 계승한 리학 계열의 퇴계학파, 그 중에서도 퇴계학을 좇던 기대승(奇大升)이 즉각 철리시로 반박했고, 노수신에게서 학문을 익힌 소재학파(蘇齋學派)에서 재반박에 나섰으며, 퇴계학파가 다시 받아치면서 두 학파 사이에서 철리시를 통한 철리논쟁이 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철리시가 풍성하게 지어질 수 있었는데요,
양명학이 심학으로 분류된 이유는, 철학적 이치를 파고드는 학문의 깊이 보다는 존심(存心), 즉 마음공부에 더 치중했기 때문인데요, 그렇지만 심학 또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리학과 다르지 않으므로 크게 보면 성리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수신은 아시겠지만 「양재역벽서사건」의 배후라는 누명을 쓰고 옥주(沃州), 지금의 진도로 유배됐고, 20여 년간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면서 학문연구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새 임금 선조가 즉위하면서 풀려나 부제학에 서용됐고, 선조 7년엔 우의정에 올라 경연(經筵)에도 참석하고 있었는데요,
노수신은 선조 7년 4월 28일 경연에서,
“지(知)와 행(行)은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주자가 분별하여 말을 했고, 세상의 유자들이 두 가지 일로 명백히 여기니,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한 것인데요,
지행합일설은 양명의 학설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요,
양명은
“아는 것, 즉 지(知)는 행(行)의 완성이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둘이 아니라 본래 하나다.”
라고 주장했지요.
지행을 합일시켜야 실천이 강화되어 치양지(致良知)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요, 누구나 도리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아서 문제이니 앎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자(朱子)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지요? 먼저 이치, 즉 리(理)를 깨우친 후 실천을 해야 보다 완전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경연이라고 하면 임금 앞에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말하죠?
그렇기에 아무나 참석할 수 없고 최고의 학문 경지에 이른 신하들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요,
노수신은 경연에서 양명의 학설을 설파하자 주자학을 좇던 유희춘(柳希春)이 즉각 반박합니다.
"대강 알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취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
(정자는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하는 거죠?)
정자의 말에,
‘비유한다면 길을 갈 때 모름지기 먼저 하나의 빛을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낮의 햇빛과 밤의 불빛을 얻어야 바야흐로 밟을 곳을 알 수 있어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를 논한다면 지(知)가 먼저가 되고 경중을 논한다면 행(行)이 중점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자,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성리학은 아주 작은 차이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요,
그것은 작은 차이가 큰 시행착오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를 경계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유명하다는 철학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요,
그분이 말하기를 <자기가 사건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더군요.
자기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사랑해야지요. 우리는 모두 부모에 의지하여 세상에 오긴 했지만 누구랑 같이 오지는 않았기에 혼자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지만 또다른 내가 존재하지는 않기에 <나>라는 존재 자체는 혼자라는 얘깁니다. 그 혼자를 내가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참으로 가엾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는 반드시 이기심에 대한 경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함에 있어 자기 사랑이 지나치면, 다시 말해 이기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고, 결국은 세상의 왕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의 철학교수는 <자기사랑>만 강조하고 이기심에 대한 경계는 말하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그는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오류를 범한 것이지요. 나에게 사건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라고 하면서도 이기심에 대한 경계를 빠뜨림으로써 세상의 왕따가 되라고 권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철학에서 그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를 간과한 것이지요.
각설하고요,
이쯤에서 노수신의 철리시를 한 편 볼까요?
元來道與器非隣(원래도여기비린)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可認人心是外塵(가인인심시외진)
인심을 외진(外塵: 색·성·향·미·촉·법)으로 볼 수 있겠는가
須就道心爲大本(수취도심위대본)
모름지기 도심은 대본이 되고
用時還見道乘人(용시환견도승인)
용(用)이자 정(情)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원래 도(道)와 기(器)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할 때의 기는 그릇 기(器)죠? 길 도, 그릇 기의 도기(道器)에서
도(道)는 형이상의 무형적 도리이고,
기(그릇器)는 형이하의 유형적 사물을 뜻하는데요,
형이상학적 도리를 담고 있는 그릇,
다시 말해 도리를 실행하는 구체적 물질,
즉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미(意)의 육근이 그것이겠죠?
육근이 있어야 도리를 실행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라는 말은 도리를 실천하는 구체적 물질이 도(道), 즉 천리(天理)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감정 외적인 것이 기器이므로 육근에 의해 실행되는 외진外塵, 즉 색·성·향·미·촉·법의 육진도 천리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도는 도를 담고 있는 그릇, 즉 육근에 의해 실행되므로 마음과 육체도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리(理)와 기(氣)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요.
(여기서 성정, 리기, 도심과 인심, 체용 등의 용어가 난무하는데요,
작은 차이들이 있지만 잘 모르겠으면 크게 <천리와 그 현상>이라고 이해하고 구체적 차이는 나중에 배워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혹은 <마음과 정신>으로 정리해도 쉬울 거고요.)
양명의 지행합일설이 성립하려면 리기(理氣)와 성정(性情)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도(道)와 기(器)도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知)는 천리(天理)이고,
행(行)은 천리에 따른 실천이니까요.
그러므로 지, 즉 아는 것은 리와 성, 그리고 도에 해당하고,
행, 즉 실천은 기(氣)와 정, 그리고 그릇 기를 쓰는 기(器)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지행합일은 천리와 그 실천이 하나여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노수신은 도와 기가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문제냐 하면 말이죠,
리(理)는 천리(天理), 즉 하늘의 바른 이치를 뜻하고, 기(氣)는 그에 따른 현상을 말하죠?
성리학의 절대명제는
<천리(天理)의 보존, 인욕(人慾)의 제거>에 있거든요.
불가에서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보고 아예 욕망을 제거하지만
성리학에서는 욕심 때문에 마음이 오염된다고 보기에 욕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데요,
리는 천리고 기는 그에 따른 현상이기에 인의예지의 사단은 리이고,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은 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보존하고 칠정 중에서 욕심은 제거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리기가 분리되지 않으면 천리와 함께 인욕도 보존해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겠죠?
욕심, 그 중에서도 이기적 사사로운 욕심, 즉 탐욕까지 제거하지 않아야 한다니, 성리학의 명제 자체를 거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可認人心是外塵(가인인심시외진)
인심을 외진(外塵: 색·성·향·미·촉·법)으로 볼 수 있겠는가
2행의 이 부분에서는 인심을 외진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외진은 색과 소리, 향기와 맛, 감촉과 법의 6진을 뜻하죠? 마음 바깥의 대상물질로 인하여 생기는 분별의식을 말하는데요,
도심(道心), 즉 본연지성의 반대개념인 인심(人心), 즉 기질지성은 정(情), 즉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이죠?
그런데 노수신은 이 칠정을 외진으로 볼 수 없으므로 도와 기(器)는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군요.
그렇습니다. 분명 색과 소리, 향기와 맛, 감촉은 감정이 아니죠.
인심이 외진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적 무형의 도리와 형이하학적 유형의 사물인 기(器)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다음 연으로 넘어가서,
須就道心爲大本(수취도심위대본)
모름지기 도심은 대본이 되고
用時還見道乘人(용시환견도승인)
용(用)이자 정(情)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노수신은 3연과 4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는데요,
어쨌거나 노수신은 도심이 대본(大本)인 것은 인정하지만
<용(用)이자 정(情)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
라고 하여
도심은 형기를 타고 인심으로 드러날 뿐이며, 인심은 인욕과는 다른 것으로, 본성인 도심이 발한 것이 인심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리가 발한 것이 기이고,
체(體)이자 성(性)인 도심이 발한 것이 인심이며, 천리(天理)인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리와 기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인의예지의 사단과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정 또한 분리되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사단은 성(性), 즉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인 천명이고
칠정(七情)을 정(情), 즉 마음이 외물을 접하였을 때 표출하는 인지적·정서적 반응이라는 정의 또한 성립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칠정 중에 포함되어 있는 욕심은 제거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되고,
따라서 <천리는 보존하고 인욕은 제거하라>는 주자의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의 명제를 통째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때문에 리기와 도기, 체용(體用), 성정(性情)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양명의 주장은 정주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학설이었죠.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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