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전은강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남사고 예언 어쩌고 하는 동영상들이 많이 떠돌던데요,
그 중 일부를 살펴보았더니 격암유록에는 있지도 않은 글을 조작해서 마치 남사고가 그런 예언을 한 것처럼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 조작된 가짜 예언에 현혹되지 마시라는 당부말씀부터 드리고 본 내용을 시작하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유명했던 예언가이자 지관이었던 남사고.
그와 관련한 설화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몇 가지만 골라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남사고와 아리랑」 편에서, 남사고는 당대의 명사들이 인정한 예언가라고 말씀드렸죠.
남사고는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붕당이 있을 것을 예언했으며, 순희세자, 문정왕후, 남명 조식 선생이 운명할 것, 선조가 왕위에 오를 것,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될 것, 등의 예언을 해서 모두 적중했다는데요,
당대 명사들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볼까요?
대동야승 「상촌잡록」에 남사고 예언에 관한 기록이 있더군요.
남사고는 명종 때 사람으로, 관동에 살았다. 그는 풍수와 천문, 복서, 관상법을 잘 알아서 전해지지 않는 비결을 모두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살면서 판서 권극례와 친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조정에 반드시 분당이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태평성대의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윤신과 함께 동교(東郊) 밖을 지나다가 태릉 근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동쪽으로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다.”
라고 했다. 김윤신이 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남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에 저절로 알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예언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이 을해년부터 의논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되는데도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되었고,
선조가 사직동 잠저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다.
태산이란 곧 태릉을 말한 것으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 이듬해에 돌아가서 태릉에 장사지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대동야승은 조선시대의 야사와 일화, 소화, 만록 등을 모아놓은 책인데요, 그 중 「상촌잡록」은 신흠)이 편술했습니다.
대동야승에 수록된 이이의 「석담일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글이 있습니다.
성관(星官) 남사고가 일찍이 누구에게 준 글에,
“금년에는 처사성(處士星)이 광채가 없다.”
하더니, 과연 오래지 않아 조식이 사망하였다.
조식은 시세(時世)에 응한 비상한 선비라 하겠다.
조식은 남명 조식 선생을 말하는 거죠?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두 학파가 크게 번성했는데요, 퇴계학파는 인의(仁義) 중 인(仁)을 중심으로,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심으로 리학(理學)을 연구했습니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도 남사고에 관한 기록이 있네요.
남사고(南師古)는 울진 사람인데, 힘껏 공부해서 역리(易理)에 능통하였다. 천문, 지리, 점술에 밝아 말한 일이 모두 기이하게 맞았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급제하지는 못했다. 벗들이 묻기를,
“자네는 남의 명수(命數)는 잘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하자, 남(南)은 웃으면서,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본성이 흐려지므로 사리판단 또한 어둡게 된다네. 내가 합격하지 못할 줄을 분명하게 알면 과장에 가지 않았을 것이나, 욕심으로 생각이 어두워진 까닭에 항상 합격될까 하고 이렇게 들떠서 왕래하곤 하는 것이네.”
라고 하였다. 만년에 천문학교수(天文學敎授)로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太史星)에 무리가 졌다. 관상감정(觀象監正) 이번신은 나이가 많으므로 자신이 이에 해당될 것이라 했다. 그러자 남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해당될 자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듬해에 남사고가 죽었다.
이 외에도 여러 문헌에 남사고에 관한 기록들이 전해져오고 있는데요,
문헌 기록 외에도 수많은 구비설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비설화는 주로 문자에서 소외된 서민층이 향유하던 문학이죠.
설화의 일화는 사실에서 발생한 것도 있지만 어떤 의도에서 창작되어 발생한 것도 있습니다.
남사고는 예언가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지관으로 더 유명했는데요,
이와 관련된 구비설화가 있습니다.
남사고는 어릴 적에 멀리 있는 학방을 다녔는데, 학방으로 가려면 불티재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불티재에 꽃 같은 미인이 나타나 남사고를 잡고는,
야광주 한 개를 자기 입에, 다른 한 개는 남사고의 입에 넣었다 뺐다 하고 놀았습니다.
그 여인이 매일 남사고를 잡고 놀았기 때문에 남사고는 매번 수업에 늦었겠지요.
훈장이 매일 지각하는 남사고를 호되게 혼냈고,
남사고는 사실은 불티재를 넘을 때마다 어떤 미인에게 홀려서 늦는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훈장은 남사고에게,
야광주가 입에 들어오면 꿀꺽 삼켜버리고는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있거라.
하고 말했습니다.
남사고는 훈장님이 시키는 대로 야광주를 삼켰지만 미인이 도로 빼앗아 갈까봐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땅을 보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하늘을 보았더라면 천지가 다 보이는 신통력을 얻었을 텐데,
땅만 보고 있어서 땅밖에 못 보는 지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사고는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지만 자신이 과거에 붙을지 말지는 점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땅은 잘 보는 사람이 어찌하여 자기 운명은 점치지 못할까,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남사고는 그런 비아냥을 들을 때마다 아마 이러한 농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곤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이런 설화도 있네요.)
남사고는 사술을 잘 부리는 사람인데, 어느 하루 불영사에 갔다가 불영사 입구에서 외를 팔고 있는 장수를 발견했습니다.
남사고는 배가 고픈데 돈이 없어서 외 하나만 공짜로 줄 수 없는지 물었습니다.
외장수가 공짜로는 안 된다고 하자 남사고는 외장수가 흘린 외씨를 주워 흙에 심었다고 하는데요, 놀랍게도 외씨가 금방 자라나서 꽃이 피고 외가 열렸답니다.
남사고가 그것을 따먹고 갔는데요,
남사고가 떠난 후 외장수가 외를 따려고 보니 외가 하나도 없고 자기 바구니에 담아놓고 팔던 외가 모두 돌멩이로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설화는 아무래도 창작이겠죠?
남사고가 도술을 부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가 명성 높은 기인이므로 민인들이 그 이름을 빌려서 보복 염원이 담긴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것을 전파하며 대리만족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시는 상인들의 농간에 정작 피땀 흘려 농사짓는 농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던 시절인데요,
당시의 농민들은 남사고 도술을 이용해 얄미운 상인들을 골려주는 내용의 설화를 지어서 그 이야기를 전파하며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남사고가 도술을 이용해서 적을 골탕 먹이는 또 다른 설화가 한 편 있는데요,
바로 남사고가 풍신수길을 골탕 먹이는 설화입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몰래 조선에 들어와 염탐하러 다니던 중 구만리,
구만리는 포항시 호미곶면에 있는 동네인데요,
그 구만리에 이르러 남사고의 명성을 전해 듣고 울진까지 가서 남사고 집을 방문했습니다.
풍신수길은 자신이 그려온 조선 지도를 남사고 앞에 펼쳐 보이며 맞게 그려졌는지 봐달라고 했는데요,
지도를 살펴본 남사고는 한 군데 빼먹은 곳이 있다고 하면서 지도 한 쪽에 점을 하나 찍었습니다.
풍신수길이 감사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는데,
남사고가 보리밥을 입에 넣고 씹다가 풍신수길의 등을 향해 내뿜었습니다.
그러자 밥알이 모두 벌이 되어 풍신수길의 얼굴을 쏘았다고 합니다.
남사고는 또 풍신수길이 하루에 구만리를 가는 도술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하인을 시켜 마당에 아홉 군데 고갯길을 만들게 했는데요,
풍신수길은 남사고 방에서 나와 하루 종일 아홉 고개 재를 넘고 또 넘었습니다.
풍신수길은 아홉 재를 다 넘어 구만리를 갔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남사고가 관을 쓰고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풍신수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지도를 펴보았는데, 지도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국 관백입니다.
위의 설화는 남사고의 신통력을 빌려서 조선 땅을 침략한 풍신수길에게 보복하는 이야기인데요,
당시 힘없는 서민들은 이렇게 남사고 신통력이라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보복의 염원을 표현하곤 했던 것입니다.)
남사고 설화, 하면 ‘구천십장(九遷十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남사고가 명당을 찾아서 부모의 묘를 아홉 번 이장을 하고 열 번 장사지냈다고 하여 구천십장이라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는 입을 통해 전해지는 구비설화의 특성 상 한 가지 일화가 여러 형태로 나뉘어져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남사고가 아버지 묘를 명당자리에 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안동김씨 집 대청마루 아래가 명당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의 집 대청마루 아래에 묘를 쓴다면 주인이 허락할 리 없겠지요. 그래서 남사고는 기회를 엿보다가 모두가 잠든 밤에 몰래 그곳을 파고 아버지 묘를 썼습니다.
남사고가 한밤중에 몰래 다녀간 사실을 알게 된 집주인은 남사고 아버지의 시신을 파내 콩밭에 묻고 대청마루 아래엔 자기 아버지를 이장해 묻었습니다.
남사고는 안동김씨 집 대청마루 아래에 아버지를 이장한 지 사흘 만에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는데요,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남사고는 자신이 묘를 잘못 쓴 것이라 생각하고 안동김씨 댁으로 돌아갔고,
자신의 아버지 유골인 줄 알고 안동김씨 유골을 파서 지고 갔습니다.
안동김씨는 하인을 시켜서 자기 아버지 유골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보게 했는데요,
그 하인은 남사고가 명산에 묘를 썼다가 자꾸만 파묘하고 이장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 주인에게 고했습니다.
안동김씨는 남사고가 파묘한 자리에 자신의 조상들 묘를 썼는데, 모두 아홉 묘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천이 되었고요,
후에 안동김씨 모두 일이 술술 풀려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다고 하는데요,
안동김씨는 남사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콩밭에 묻었던 남사고 아버지의 유해를 자신의 집 대청마루 밑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산신이 남사고 앞에 나타나서,
“남사고야, 구천십장 남사고야, 비룡상천(飛龍上天)이 웬 말이냐, 고사괘수(枯死掛樹) 아니더냐?”
라고 귀띔하더라고 합니다.
고사괘수 혈은 나무가 말라 죽는 흉한 자리를 말하는데요,
남사고는 그제야 아버지의 진짜 유해가 아직도 안동김씨 대청마루 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시 가서 아버지 유해를 다시 모셔갔습니다.
그래서 십장이 되었지요.
남사고는 마지막으로 울진 근남 수곡리의 대현산 비룡상천 자리에 아버지를 묻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장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묘 쓴 곳을 돌아보니 후사가 끊길 자리더랍니다.
실제로 남사고는 아들 남응진을 일찍 잃었는데요,
남사고는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보다!”라고 탄식했고, 더는 명당을 찾아 이장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남사고가 산신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넓은 바다인 줄 알았던 묘 아래가 실은 메밀밭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 아버지 묘가 아닌 어머니 묘를 구천십장했다는 설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화와 달리 남사고가 실제로 부모 묘를 이장한 것은 이천삼장(二遷三葬)이었다고 합니다.
(이 구천십장 설화에서 ‘안동김씨’가 상징하는 재지사족 지배층은,
<남사고는 한낱 어리석은 지관에 불과하다>
라고 조롱을 하고 있는데요,
남사고 신통력을 통해 지배층을 조롱하는 민중을 향해,
<자신의 대가 끊어지는 것도 막지 못한 지관에게 무슨 신통력이냐>
라고 반박하는 설화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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