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5일 수요일

강홍립姜弘立 장군의 선택

 

요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가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요, 러시아군을 돕는 체첸과 시리아 등의 용병이 있다죠? 그런데 러시아군이 졸전을 거듭하는 바람에 그들 용병의 피해도 막강하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조선시대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1618, 광해군 10년에 무리하게 후금 원정을 나섰던 중국 명나라가 우리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했는데요, 이때 명군을 도우러 파견되었던 조선 원병이 명군의 거듭된 졸전에 큰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원병을 이끌고 간 최고 책임자는 강홍립 오도원수(五道元帥)였습니다.

 

강홍립은 1560(명종 15)에 태어나서 1627(인조 5)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무신입니다. 아버지는 평난공신(平難功臣)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이며, 어머니는 정유의(鄭惟義)의 딸인데요, 황이형(黃履亨)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1589(선조 22)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합격하고 1597(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됐습니다. 이듬해 홍문관교리와 수찬 후보로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이 올랐으나, 홍문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됐습니다.

 

1599(선조 32)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돼 나갔는데요, 이때 오랑캐 응징을 위한 북벌 계획을 세워 임금께 올렸지만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1601(선조 34)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돼 내직으로 돌아왔고, 공조정랑, 예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고 1602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됐습니다.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재임명됐을 때는 개인의 일에 공문을 만들어 형조에 보낸 전성군 이준(全城君 李準)을 탄핵했습니다.

1604년 다시 홍문관수찬에 제수됐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겸하며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성균관전적, 문사낭청(問事郞廳), 어전통사(御前通事), 예조정랑, 부교리, 성균관직강, 내자시정(內資寺正), 함경도순검어사(咸鏡道巡檢御史) 등을 역임한 후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됐습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성균관사예지제교(行成均館司藝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한학교수(春秋館編修官漢學敎授)로 선대 실록 신건(新件)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순검사(巡檢使) 등을 역임했고, 1618(광해군 10)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는데요, 이 해 만주족 후금(後金)이 요동을 차지하자 명제는 후금 정벌을 결정하고 조선에 원병을 청했습니다.

 

1580년대 일어난 만주족 누르하치 세력은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습니다. 그러더니 점차 번성하여 1618년에는 명나라 무순(撫順)을 공격했고, 명나라는 후금을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정벌에 나섰던 겁니다.

 

광해임금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도움을 받았으므로 보답 차원에서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13천여 명의 군사를 내어주고 명나라로 보냈습니다.

 

강홍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 노성(老城)으로 갔고, 명나라 대장군 유정(劉綎)의 휘하에 소속되어 후금군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후금군을 얕잡아보고 무작정 쳐들어갔다가 졸전을 거듭합니다. 강흥립이 거느린 조선원병도 심하(深河)전투에서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요, 강홍립은 부차(富車)전투에서 명나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병사를 아끼고 실리를 챙기기 위한 결단으로 후금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신세를 크게 졌으니 갚긴 갚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후금은 강성하고 명나라는 쇠퇴하던 때였습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마냥 명나라 편을 들다가는 후일 우리 조선이 후금에게 큰 보복을 당할 것인데, 명나라는 조선을 지켜줄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일 후금이 더욱 강성하여 조선을 응징한다면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 있으므로 후금을 더는 자극하지 않기 위한 책략으로 투항을 선택했던 겁니다.

 

후일 강홍립은 이 일로 인해 조정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는데요, 인조 임금은 대간들의 탄핵을 윤허하지 않습니다.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죠.

 

예전 임금인 광해임금은 강홍립에게 파병군을 맡겨 보내며, “전쟁에서 명나라가 지면 후금의 노여움을 살 것이고 그 보복이 사나울 것이니 형세에 따라 스스로 향배를 정하라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광해임금이 강홍립에게 향배에 따른 결정 전권을 위임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도원수 강홍립은 명나라에 파견된 직후부터 수시로 임금께 치계를 올려서 돌아가는 전투 상황을 세세히 보고했거든요. 그런데 광해임금은 명나라가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강홍립의 보고를 받고도 명나라가 지더라도 후금에 투항하지는 말라는 지시를 따로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투항 여부를 도원수의 판단에 맡긴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광해임금의 속뜻을 읽은 강홍립이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투항을 결정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휘하 장수와 참모들이 투항에 반대하지 않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렇기에 광해 임금이 강홍립에게 어떤 언질을 주어서 보냈다라는 주장이 대두된 것입니다.

 

조선군이 후금군에 투항했던 그 이듬해에 금나라군의 포로가 되었던 조선 병사들은 모두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강홍립과 김경서 등 장수들은 후금에 계속 억류됐고,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에야 조선을 침범한 후금군과 함께 들어올 수 있었는데요,

갈 때는 광해 임금 시대였지만 올 때는 인조 임금 시대였던 겁니다.

 

강홍립은 후일 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화의(和議)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간(臺諫)들은 강홍립을 역신으로 몰아서 결국 삭탈관작했는데요, 강홍립이 과거 명나라에 파병됐을 때 후금에 투항하는 바람에 명나라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그로 인해 후금이 강성하여 조선을 넘보게 되었으며, 후금이 쳐들어오자 후금과 조선의 화의에 앞장서서 적국을 이롭게 하였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강홍립이 명나라를 위해 병사들을 희생시키며 열심히 싸우고, 그래서 명나라가 이겼다면 후금이 그토록 강성해져서 조선까지 침범하는 정묘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후금정벌에 나선 명나라군이 열심히 싸우지 않는데, 남의 나라 정벌전쟁에 파병된 우리 조선의 병사가 굳이 목숨 걸고 싸워야 했을까요? 만일 그때 강홍립이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우리 조선 병사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

요즘 러시아 침략자 편에서 불의의 피를 흘리고 있는 용병도 러시아에 신세 진 것이 있어서 이를 갚으러 참전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홍립의 선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강홍립은 본국으로 돌아와 삭탈관작된 1627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후에 관작이 복관됐습니다.

 

참고 󰡔일성록󰡕, 󰡔계곡집󰡕(장유), 󰡔두산백과󰡕,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