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우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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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조지훈(趙芝薰)의 시 ‘승무(僧舞)’는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조지훈이 열아홉 살 가을에 수원 용주사에서 본 승무의 기억을 더듬고, 스물네 살 여름에 미술전람회에서 본 김은호의 「승무도」를 떠올리며 썼다고 합니다.
조지훈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는 자신의 시 ‘이력서’에서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내시는 어머니의 태몽에 안겨 세상에 왔’고, ‘만세를 부르고 쫓겨나신 아버지의 뜨거운 핏줄을 타고 이 겨레에 태어났’다고 표현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동탁(東卓)인데요, 할아버지가 동방의 인재가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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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조지훈이 태어난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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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조인석(趙寅錫)은 사헌부 대간으로 봉직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자 낙향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세우고 신학문 운동을 펼쳤는데요, 조지훈은 그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공부하고 영양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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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월록서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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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그러나 일제의 교육이 싫어서 3년만 다닌 후 자퇴했고, 와세다대학 통신강의록을 구해서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趙憲泳)은 1900년에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재일 조선유학생 학우회 대표와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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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헌영이 유학 중이던 1923년 10월에 <대역사건>으로 알려진 일왕 암살 기도사건이 일어나고, 경북 상주 출신인 박열 의사(義士)가 주범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됩니다. 재판에 넘겨진 박열은 ‘피고라 불러 죄인 취급 하지 말 것,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에 배치할 것, 조선 예복을 입고 법정에 서는 것을 허락할 것, 「독립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 이 네 가지 사항을 일본법원에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면회를 온 조헌영에게 사모관대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는데요,
조헌영은 박열 의사의 부탁을 받고 급거 귀국하여 아버지가 사용했던 조선관복을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박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박열은 그 조선관복을 입고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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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영은 귀국할 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서 뒷방에 소중히 보관했는데, 어린 조지훈은 박열이 일본법정에서 입었다는 사모관대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조지훈에게는 세 살 위인 조세림(趙世林: 본명 조동진趙東振, 1917~1937)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조세림은 시인의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했고, 조지훈 또한 함께 시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조지훈은 열 살에 동요를 지었고, 열두 살 때에는 형 조세림이 주도하여 만든 <꽃탑회>라는 소년회에 참여해 마을 소년들과 함께 꽃탑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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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1901년생인 영양출신 오일도(吳一島: 본명 오희병吳熙秉)가 문단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오일도는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의 친구였습니다. 오일도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근화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에 시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는데요, 1935년에는 시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하고 출판사 <시원사>를 경영했습니다.
시인이 꿈이었던 조세림과 조지훈은 1937년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선배 시인인 오일도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고, 아버지가 설립한 인사동의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 겸 <일월서방(日月書房)>에서 지내며 오일도에게서 시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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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아버지 조헌영은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경북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조지훈이 훗날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조지훈의 형 조세림은 <꽃탑회>를 불온단체로 규정한 일제경찰의 취조를 받고 나온 후 화가 나서 술을 많이 마셨고, 하필 그때 어금니를 뽑은 상태여서 수풍으로 요절하고 말았는데요, 그때 나이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조지훈은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괴로워했고, 이듬해에 시인 오일도와 함께 <시원사>에서 형 조세림의 유고시집 세림시집(世林詩集)을 펴내 그 넋을 위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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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조지훈은 독학으로 전문학교 입학자격을 취득하여 1939년 혜화전문학교(후에 동국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등단한 시인 서정주(徐廷柱)와, 오일도가 창간한 시원 동인으로 활동하며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혜화전문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시인 김달진(金達鎭) 선배를 알게 됐고, 그들과 함께 시를 토론했습니다. 그러면서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을 응모했는데, 시인 정지용(鄭芝溶)으로부터,
“시에서 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천성(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시니, 시단에 하나 신고전을 소개하며……”
라는 추천사와 함께 초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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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지훈문학관 내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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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서울의 문학청년 14명, 일본 예술과 학생 4명, 기타 2명과 함께 동인활동을 했고,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이 실린 동인지 백지(白紙)에 「귀곡지(鬼哭誌」, 「계산표」 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얼마 후에는 명시 「승무」로 2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40년 2월 「봉황수(鳳凰愁)」와 「향문(香紋)」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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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지훈은 1940년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性奎: 1904∼1946)의 딸 김위남(金胃男)과 결혼했고, 아버지가 경영하다 물려준 <일월서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조지훈은 이듬해 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불교강원 외전강사’ 자리를 얻어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마을」, 「고사(古寺)」, 「달밤」, 「산방」 등의 시를 지었는데요, 조지훈은 후일 「나의 역정」이라는 글에서, “자기침잠의 공부에 들었던 그 1년은 나의 시에 한 시기를 그은 것이 사실이요, 그만큼 나의 생애에 중요한 도정이기도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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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일제가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고 조선민족사상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단계적 조선어 말살정책을 펴고 있었는데요, 조지훈은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말조차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하산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조헌영의 뒤를 이어 조선어학회에 가입하고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는데요,
조선어학회는 1942년 4월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에 원고 일부를 넘겨 큰사전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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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함흥영생고등여학교 여고생 박영옥이 기차에서 한국말로 대화한다는 이유로 조선인 순사 안정묵(혹은 안전임: 일본명 야스다)에게 연행됐고, 안정묵은 박영옥을 고문해서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인 정태진(丁泰鎭)이 학생들에게 민족주의를 감화시켰다는 억지자백을 받아내고 9월 5일 정태진을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안정묵은 다시 정태진을 고문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목적의 민족주의단체라는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내란죄를 적용하여 회원 전원을 연행해 26명을 기소했는데요,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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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도 이때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지만 일단 풀려났습니다. 조지훈은 일제경찰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갔고, 조선어학회사건이 잠잠해진 후 다시 상경했습니다. 그땐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서울 거리에 젊은이들이 드물었고, 아울러 젊은 문인들 상당수도 몸을 피하고 없었고, 일제의 국책문학기관지인 국민문학이 창간돼 변절한 문인들만 일제 찬양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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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일제에 순응한 어용문학단체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라는 강요를 받지만 거부하고 강제징용을 피해 경주로 갔고, 시 「파초우」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 친구 박목월(朴木月)을 만나 술을 마시며 시 「원화삼(玩花衫)-목월에게」를 지었습니다.
조지훈은 징병을 피해 고향에 숨어 지냈고, 잠시 상경하여 대학병원에서 ‘폐침윤 및 신경성 위-아토니’라는 진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조지훈이 시 「고목」, 「낙화」 등을 지으며 요양을 하고 있던 1945년 3월 징용번호가 나왔고,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대학병원 진단서 덕분에 ‘노무(勞務) 감내 불능’ 판정을 받고 귀가조치 됐는데요,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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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문단은 친일문인을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8월 16일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계열의 김남천, 임화, 이태준 등이 중심이 되어 한청빌딩에 걸린 <조선문인보국회> 간판을 뜯어내고 <조선문학건설본부> 간판을 걸었습니다. 또 임화 주도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발족했는데요, 9월 8일에는 박종화, 김영랑, 김광섭, 변영로, 오상순, 오종식 등의 반 카프 계열이 모여 <조선문화협회(후에 중앙문화협회)>를 발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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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도 해방을 맞아 상경했고, 명륜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과 <조선어학회 중등국어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 국사교본 편찬원>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말 회복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정지용, 박종화, 임화, 이병기, 양주동, 오장환 등 좌우익 문인들이 함께 작품을 모아 해방기념시집을 간행했는데, 조지훈도 시 「산상의 노래」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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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서 <삼국외상회의>를 열고 ‘대한민국 임시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와 5년간의 ‘미·영·중·소 4개국 신탁통치’를 합의합니다. 우리 민족은 찬탁과 반탁으로 양분되어 사상대립이 극심해지고, 문화계 또한 좌우로 갈라져 극한 대립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문단에서는 우익의 <전조선문필가협회>가 창립되고, 좌익의 <조선문학자동맹>이 창립되어 맞섰습니다. 양측은 세를 불리기 위해 과거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해 활동한 변절 문인들까지 용서와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끌어들임으로써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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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1946년 3월 정지용, 정인보, 박종화, 채동선, 설의식, 김광섭, 이하윤 등 50여 명의 문인이 이름을 올린 <전조선문필가협회(이 단체는 이듬해인 1947년 2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로 확대 결성된다)>에 참여했고, 조지훈, 김동리, 곽종원, 조연현, 최태응 등이 따로 모여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는데, 조지훈은 시부와 고전문학부를 맡아 「해방시단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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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이 해 2월부터 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6월에는 정지용 추천으로 문장을 통해 등단한 박두진(朴斗鎭),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靑鹿集)(1946.06, 을유문화사)을 펴냈는데요, 조지훈은 「승무」, 「봉황수」 등의 시 12편을, 박목월은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을, 박두진은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등 12편을 실었습니다. ‘청록집’이라는 제목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으로, 이때부터 그들 세 명의 시인은 ‘청록파’로 불리게 됐습니다.
조지훈은 이 해 9월 서울여자의전 교수가 됐고, 이듬해인 1947년 4월엔 모교 동국대학교의 강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6개월 후에는,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인 현상윤(玄相允)의 발탁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고려대 문과대학 전임교수에 초빙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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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훈은 성북동 자택에 있다가 박목월이 찾아와서 말해주어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데요, 6월 26일 오후 2시 고려대학교 3층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하고 있을 때 의정부 방면에서는 총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27일에 박목월, 서정주 등의 문인들을 만나 피난 문제를 의논했고, 28일 새벽 인도교가 끊어지자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7월에 후방에서 결성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에 가입하여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UN군이 반격해 북진할 때 종군작가로서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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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UN군 참전으로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으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4후퇴가 있었고,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 함락됐습니다.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철수했고, UN공군도 대구공항으로 후퇴했습니다.
평양까지 갔다가 1·4후퇴로 돌아온 조지훈은 혼란한 상황에서 <문총구국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박두진, 박목월이 머물고 있는 대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대구에 머무는 문인들과 함께 <공군종군문인단>, 일명 <공군부락부>를 조직했는데요, 마해송이 단장을 맡고 조지훈이 부단장을 맡아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UN공군의 활약을 국민들에게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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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조지훈은 공군수송기를 타고 서울 여의도기지로 향했고, 일주일가량 공군전황을 취재했습니다. 조종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종군기를 써서 「공군순보」와 일반 신문잡지에 기고했고, 군악대 김성태 씨가 작곡을 맡고 조지훈이 작사를 맡아 군인들을 위무하는 노래를 많이 만들었는데, 현재는 「은익(銀翼)의 노래」 한 곡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엔 대구에서 첫 시집 풀잎단장(斷章)(창조사)을 펴냈고, 이듬해인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으로 휴전이 선포되자 조지훈은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피난을 가지 않고 있던 아버지 조헌영이 전쟁 중에 납북되었고, 할아버지 조인석은 좌익청년들의 사상공격을 받고 자살했으며, 그 충격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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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10월 3일 서울로 올라갔고, 평론집 시와 인생(박영사)과 시의 원리(산호장)를 간행했습니다. 장준하(張俊河)가 발행인인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1956년 조지훈 시선(정음사)을 펴냈고, 자유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지훈은 1960년 1월 24일, 3·15선거 공명선거추진위원회 중앙위원에 추대됐고, 2월 10일 여수 민주당 간부 피살사건 때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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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지 3월호에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를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의 독제에 협력한 변절정치꾼들을 강력히 비판했고,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한국교수협회 중앙위원>을 맡아 4월 25일 교수단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전국 국민 10만여 명이 이튿날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고, 이기붕의 집을 파괴하고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습니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5월 29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을 가면서 12년간의 이승만 독재가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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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3·1독립선언기념비 건립위원회> 이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평의원 등으로도 활동했고,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으며, 1962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했습니다.
1965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 편찬위원이 됐고,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시 「우리는 또다시 노예일 수 없다」를 발표하여 미국의 압력에 의한 굴욕적 협정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1967년엔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한국신시 60년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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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1968년 사상계 1월호에 「병에게」라는 시를 발표하고 5월 17일 새벽 49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양구군 마석리에 안장됐습니다.
참고: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 「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김삼옹의 인물열전블로그), 두산백과(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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