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1일 금요일

권율의 종사관 황여일,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 장군을 만나다


 
정유년(1597) 112일 왜적 병선 150여 척이 바다를 건너 다대포에 정박했고, 13일 다시 왜선 130여 척이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14일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병선 2백여 척이 기장에 정박했고, 또 다른 왜적 병선 60여 척은 죽도에 정박했습니다. 3월경에는 왜적 병선 1천여 척이 바다를 건너던 중 조선 수군의 탐망에서 사라져 그 행방이 묘연했고, 324일에는 왜군이 조선 어부 하감동의 도움으로 판옥선을 한 척 건조했으며, 4월에는 왜적이 가덕도 주변에 병력을 증가시켰고, 6월에도 계속해서 왜선이 바다를 건너와 곳곳에 정박했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인데요,
 
재란 조짐이 확연해지자 도원수 권율 장군은 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가덕도와 안골포의 왜적을 쳐부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도원수 권율 장군의 명에 따르지 않은 채 가덕도와 안골포 왜적은 수군이 아닌 지상군이 무찌르는 것이 옳다고 조정에 건의했습니다.
원균의 이런 행동에 대해 당시 권율 장군이 얼마나 어이없어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남아 있습니다. 도원수 권율은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 장군을 만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경상좌우수사와 전라좌수사를 지휘하겠다고 했으나 원균은 지휘할 것 없다고 하였소.”
 
라고 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싸우지 않으려는 원균에게, 그대가 싸우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수군을 지휘해서 가덕도와 안골포 왜성을 공격하겠다며 수군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청했지만 원균이 그것도 거절했다는 뜻입니다.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에서 1만이 채 못 되는 군사로 왜적 3만을 맞아 싸워서 24천을 적을 사상시키고 승리한 명장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해전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원수부에 와서 백의종군 중이었습니다. 권율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도움을 받으며 수군을 통제해서 왜적과 싸운다면 크게 이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원수 명령에 불복하고 싸우지 않은 원균은 문책을 피할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원균은 도원수의 요구임에도 지휘권을 이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이때 권율 장군이 수군 지휘권을 이양 받아서 가덕도와 안골포의 왜적을 쳐부수었다면 정유재란은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었겠지요. 어쩌면 정유재란 자체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왜적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만 입혔어도 적어도 칠천량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전멸하는 상황은 모면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수군통제사 원균은 무슨 배짱으로 감히 도원수의 명을 그토록 가벼이 거역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유지의 내용은,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 되고, 육군이 먼저 쳐서 왜적의 수를 줄여놓은 후에 수군이 육군과 연합하여 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엇갈리자 조정에서 나름대로 조정을 한다고 한 모양인데, 전쟁 중인 상황에서 조정이 도원수의 지휘권을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지휘체계를 무너뜨리고 작전계획을 방해한 꼴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권율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군사의 일을 의논한 후 작계를 수립했는데요, 그러나 권율 장군은 도원수의 직무를 수행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종사관인 황여일에게 이순신 장군과 군사의 일을 의논하게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때 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었다고 말했는데요, 당시의 도원수부는 초계(지금의 합천)에 있었습니다. 원수부 부근 초가에서 생활하며 도원수가 부르면 원수부로 가고, 아니면 도원수 종사관인 황여일이 이순신 장군의 거처로 찾아가서 뵈었습니다. 직책 없이 원수부의 작계에 조언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음력 1월에 나국(拿鞫: 죄인으로 체포돼 국문을 받음)과 동시에 파직됐고, 4월 사면령을 받아 백의종군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요,
 
 
전쟁이 소강국면이던 1596818, 조선 통신정사 황신과 부사 박홍장, 그리고 명나라 책봉사 앙방형과 부사 심유경은 왜국으로 건너가서 왜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강화협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만 상대했고, 조선 통신사는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조선국왕 국서도 받지 않았고, 다시 군사를 보내 전쟁하겠다고 협박했으며, 황신과 박홍장을 숯불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황신과 박홍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일본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강화협상은 결렬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재침을 결정했습니다.
 
1597(선조 30) 1월 중순부터 왜적 병선이 대대적으로 조선으로 향했고, 2월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출정할 장수들을 정하고 규칙을 하달했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죄인으로 잡아 한양으로 압송하고 국문했습니다. 죄명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소탕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르지 않고 한산도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간 것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넌다는 첩보가 믿을 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의 부하로서 이중첩자로 활동한 요시라(要時羅: 가케하시 시치다유)가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유인해 격멸하려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정월 모일에 바다를 건널 것이니 수군을 시켜 사로잡으면 될 것이다.’
 
라고 거짓정보를 흘렸습니다. 그것은 왜적이 이순신 장군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만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에 윤두수와 김응남 등은 선조임금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를 쳐부술 기회라며 이순신을 보내 습격하게 해야 한다고 아뢨고, 임금이 이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이때 이미 기장에 들어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덫에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의 덫이라고 의심한 이순신 장군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충청도병마절도사였던 원균은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거역한 것은 왜적이 두려워서 몸을 사린 것이라고 상소했고, 이산해와 윤두수, 김응남, 정탁 등도 이순신이 전투에 싫증이 나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며 원균을 거들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왜추(倭酋)가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줬는데도 우리가 능히 해내지 못했으니, 이 나라야말로 진정 천하에 어리석고 변변치 못한 나라이다.”
 
라고 통탄했고, 북인 영수 이산해는,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으니 두려워서 고의로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라고 모함했습니다.
 
 
이에 임금은,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치지 않고 놓아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원균의 아들이 공을 세웠음에도 그 공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며) 남의 공을 날조한 것은 방자하여 임금 어려운 것을 모르는 죄이다.”
 
라고 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원균으로 교체하고 이순신을 죄인으로 압송하라고 명했습니다. 또 이순신을 죽일 수 있는지 법률을 검토하라고도 하명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순신은 4월 사면령을 받고 권율의 도원수부로 가서 백의종군했지만 하필 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도원수부 진중에 묶인 몸이라 어머니 장사를 치르러 가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615.
맑고 흐리기가 반반이다.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어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초계 원(수령)이 떡을 마련해 보냈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군관을 보내어,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했다. 나도 뒤를 따라가서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주저앉았고, 정상명을 보내 병이라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황여일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의 상황변화를 알리고 왜적의 움직임을 알리며 좋은 계책을 물었고, 그것을 정리해서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과 자주 만났고, 그 일을 난중일기에 여러 차례 기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619일 자에는 황여일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기록되어 있고, 625일에도,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이 왔는데,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라고 썼는데요, 황여일은 권율 장군이 오면 해전에 관한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보고해야 했으므로 새벽부터 장군을 찾아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균은 도원수 권율의 출전 명령에 불복종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기간에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적발됐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비위를 전공으로 상쇄하기 위함인 듯 77일 전함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했는데요, 79일 왜적 병선의 기습을 받아 4백여 명의 수군과 12척의 전함을 잃고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권율 장군은 대로했고, 원균을 도원수부로 불러서 직접 곤장을 쳤습니다.
 
황여일은 부관 정인서를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황여일에게로 달려갔고, 분통함을 토로하며 수군을 걱정했는데요, 그 날의 일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714. 맑다.
(……)오전에 종사관 황여일이 정인서를 보내 문안했다. (정인서가)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金億)의 편지를 보여줬는데, ‘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9일 왜선 1천여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일기를 쓰고 있던 시각, 왜적 병선은 바다 한가운데에 다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715일 한밤중에 조선수군 눈을 피해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했고, 칠천량에 주둔한 조선수군을 급습했습니다.
원균은 왜적 급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병선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지만 허무하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원균이 견내량(見乃梁)으로 가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습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전선을 잃은 대패였지만 그나마 이순신의 다섯 아들(“조선왕조실록에는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을 말한다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로 불리던 이순신 장군의 핵심참모 중 한 명이었던 배흥립이 부서진 전함 7척을 거느리고 겨우 탈출하여 한산도로 향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람이 여럿인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균이 처음 수전에 나서게 됐을 때 이순신의 다섯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참모인 배흥립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거절 못하고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또, 경상우수사 등의 보고로는, 적의 무리가 원균을 추격해갔으므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안세희, 가리포 첨사 이응표, 함평현감 손경지, 별장 유해 등이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백의종군 중 황여일과 수시로 만나 군사의 일을 의논했다고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610.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보고, 조용히 말하는 사이에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탄, 당면한 토벌과 방비에 관한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하는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돌아가는 것조차 잊은 채 이야기했다.
 
617.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한 시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나의 임시 거처로 돌아왔다.
 
625. 맑다.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군대의 일을 토론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627. 맑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710. 맑다. (: 이순신의 둘째아들 이열)과 변존서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찍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情懷)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한 시진 넘게 이야기했다.
 
724. 비가 계속 내렸다. 방응원이 정개산성(鼎蓋山城: 경남 하동군 종화리에 있는 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라 했다고 했다.
 
조선 수군이 괴멸하다시피 한 칠천량해전의 대패는 왜적에게 남해안 상륙로를 활짝 열어준 꼴이었습니다. 14만 왜적이 일제히 육지에 상륙해 진격을 준비하자 권율은 직접 적을 막으러 정개산성으로 가면서 좌방어사(左防禦使) 변응성으로 하여금 왜적의 예상 진격로에 가서 기다렸다가 적을 맞아 싸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6만 군사를 조선으로 출병시켰습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 원군이 상륙하게 될 한진(漢津: 지금의 아산만 한진포구, 평택항) 방어를 위해 권율을 불러올렸습니다. 수군이 없어 지상군만으로 왜적을 감당해야 하는 때에 가장 강한 도원수의 군사가 한진 방어를 위해 빠져야 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한진으로 향하며 종사관 황여일에게 주변의 관군을 불러 모으고 적이 호남으로 향하지 못하게 정개산성에서 막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 날의 일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725. 저녁나절에야 맑았다. 종사관 황여일이 서찰을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언공이 와서 (편지를)보고는 그 길로 원수부로 달려갔다. 배수립(배흥립의 아우)이 와서 보고, 또 이곳 주인 이홍훈이 와서 봤다.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적과 싸울 기회를 얻은 이순신은 정개산성으로 달려갔고, 황여일과 진주목사를 만나 정개산성 방어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726. 비가 오락가락 하다.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아래의 송정 아래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 그리고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난중일기중에서
 
이때, 조정에서는 원균이 죽은 것으로 최종 확인되자 이순신 장군의 복직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마당에 수군통제사가 무슨 필요냐는 북인과 서인의 주장에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은 그렇기에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청했고, 임금은 이를 받아들여서 이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가 아닌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끝내고 원수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원수 종사관 황여일은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습니다. 유사(儒士)이면서도 전술전략에 뛰어났기에 권율 장군이 종사관으로 발탁했던 것인데요, 황여일은 권율 장군을 도와서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유장(儒將)이었습니다. 그는 1556(명종 11) 강원도 울진(蔚珍: 지금의 경북 울진) 기성(箕城)의 사동(沙洞)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자는 회원(會元)이며, 호는 해월(海月), 해월헌(海月軒), 만귀(晩歸) 등입니다. 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어머니는 사직 정창국(鄭昌國)의 딸 영덕정씨(盈德鄭氏)였습니다.
 
황여일이 태어난 사동골댁집, 혹은 사동골택집은 지관(地官)들 사이에서 강릉 이남 제일의 집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는 정선군수를 지낸 권조가 평해에 입향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사위 이명유(1467~1535)가 홍천군수에 재임 중이던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를 입고 파직됐습니다. 그러자 이명유의 장인 권조는 사위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려고 그 집을 이명유에게 물려줬습니다. 그리고 이명유가 다시 사위 정창국에게 물려주고, 정창국이 사위 황응징에게 물려주게 됐는데요, 황응징이 물려받은 후 평해황씨 종가가 됐습니다.
 
황여일이 그 집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호를 따서 해월종택(海月宗澤)이라고도 하는데요, 유교적 원리가 적용된 자 형태로,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있습니다.
 
황여일은 여덟 살 위인 외삼촌 정담(鄭湛: 1548~1592)과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정담의 아버지 정창국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데요, 정담이 태어난 곳도 황여일이 태어난 사동골댁집이었습니다. 정담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고아가 됐기에 누나인 황여일의 어머니가 키웠던 것입니다.
 
정담은 1571년 신립장군 군진에서 돌격장을 하다가 1575(선조 8) 무과에 급제하여 회령도호부판관과 경원도호부판관을 역임하고 이탕개(尼湯介: 니탕개)의 난 때 이탕개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습니다. 청주목사, 오위도총부도사, 김제군수 등을 역임한 후 임진왜란 때 전주진관병마첨절사에 임명됐습니다. 진군의 주장이 된 것인데요,
당시의 전라절제사였던 권율은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적이 전주로 향하자 정담에게 필사적으로 막을 것을 명했습니다. 정담은 전주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동복현감 황진, 해남현감 변응정 등이 거느린 군사를 불러서 웅치(熊峙: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지금의 곰치재)에 진을 치고 왜적을 기다렸습니다. 황박과 이복남 등에게는 고개 위에서 적을 막게 하고 정담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아래쪽에 가서 1차 방어선을 구축했는데요,
159277, 드디어 왜적이 정담의 군사를 공격해왔습니다. 정담은 왜적을 맞아 싸우며 붉은 기 아래에 백마를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쏴 죽이는 등 수많은 적을 쏘고 또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계속 밀려오는 왜적과 싸우다 싸우다 지쳐 그만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부하들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것을 권했지만 정담은,
 
내가 도망치면 적의 기세가 오를 것 아닌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라고 말한 후 끝까지 싸우다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종사관 이봉을 비롯하여 휘하의 군사들 또한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정담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고 합니다.
왜적은 뻔한 열세에도 도망치지 않은 정담과, 정담을 따라 장렬히 전사한 조선군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선군 전사자 시신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吊朝鮮國忠肝義膽: 조의를 표함, 조선국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담력)’이라고 적은 표목을 세웠습니다.
 
전북 완주군(完州郡) 소양면(所陽面)에 있는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됐고, 1979년 정부지원으로 웅치전적비가 세워졌습니다.
 
왜적은 정담의 군사만 상대하고서도 벌써 지쳐버렸고, 그래서 웅치 위쪽에 진을 친 황박, 이복남, 황진, 변응정 등의 군사와 싸워서 패했습니다. 결국 왜적은 웅치를 넘지 못하고 후퇴하여 이치(梨峙: 대둔산 남쪽의 일명 배티재)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습니다.
권율 장군은 자신의 명을 성실히 수행하다 전사한 정담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담의 생질인 황여일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삼았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도원수 종사관인 황여일의 부관 정인서를 일컬어 평해에 사는이라고 했는데요, 정인서는 황여일의 외가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황여일은 1576(선조 9) 진사회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고, 1585(선조 18)에 별시문과 을과로 아원(2) 급제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습니다. 선조임금은 황여일의 학문에 감명 받아 여러 차례 편전(便殿)으로 불러 밤늦게까지 강론했는데요, 이를 시기한 간관들은 1588(선조 21) 하번사관(비번사관)임에도 처신을 삼가지 않고 멋대로 궁궐에 드나든다는 이유로 황여일을 탄핵했습니다. 비록 임금이 불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법을 어긴 것이고, 상번사관도 못 들어가는 편전에 하번사관이 들어가서 임금을 독대한다는 것은 사실만을 기록해야 할 사관의 처신이 아니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여론을 몰아갔던 겁니다. 그 일로 파직을 당한 황여일은 고향 울진으로 내려가 해월헌을 짓고 학문으로 마음을 수양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당시의 우의정이고 동인이었던 이산해가 해월헌 현판을 썼고, 이항복, 정탁, 신흠 등이 시와 글로 찬했습니다.
황여일의 파직은 길지 않아서 얼마 후 임금이 예문관봉교에 제수하고 소환했습니다. 경상도어사로 나가서 영남지역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살피고 오기도 했지만 주로 선정전(宣政殿) 경연에 입시해 임금 앞에서 강론했는데요,
 
1589(선조 22) 11월 왜의 사신 겐소(현소)가 전쟁을 협박하며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중신들은 왜에 통신사를 보내 화친을 청하자는 쪽으로 중론을 모아가고 있었으나 사헌부감찰이던 황여일은,
 
양국의 국교가 열려도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열리지 않아도 일어날 것입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국교를 끊고 전쟁에 대비함이 옳습니다.”
 
라고 하며 통신사를 보내는 것에 강력 반대했습니다.
 
황여일은 그 얼마 후 함경도 고산도찰방에 임명됐고, 곧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1592615일 평양성이 왜적에 함락됐고, 622일 의주에 행재소(行在所)가 차려졌습니다.
이때 류성룡은 황여일에게 명나라의 뛰어난 화전(火戰) 비방(秘方)을 알아내라는 밀령을 내립니다. 이에 황여일은 명나라 장수 이영춘과 친하게 지내며 그 비방을 알아내서 류성룡에게 보고했습니다.
황여일은 1594(선조 27) 형조정랑에 임명된 후 병조정랑과 형조정랑을 번갈아 역임했습니다. 그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에 올랐고, 겨울부터는 형조판서를 겸하게 됐습니다. 권율 장군은 형조의 집무를 보며 정랑 황여일을 알게 된 듯합니다. 그 후 황여일은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이 되어 초계 도원수부로 내려가는데요,
초계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권율 장군은 왜적이 두려워 탈영하고 전주로 숨은 무사(武士)를 참수합니다. 그 일로 권율 장군은 탄핵을 받고 파직되고 맙니다. 권율 장군은 도원수가 군법으로 탈영자 하나 참수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발했고, 갑옷을 벗어던지고 시골로 내려가면서 종사관 황여일과 최상중에게 휴가를 주었습니다. 사간원에서 이를 문제 삼아 임금께 황여일과 최상중의 문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고, 황여일을 행세자익위사사어(行世子翊衛司司禦)에 제수하고 조정으로 불러올렸습니다.
 
얼마 후 임금은 권율 장군을 사면했고,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에 제수하고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사양하며 소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권율 장군을 불러 내구마(內廏馬)를 하사하며,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됐겠는가.”
하고 달랬고, 권율 장군은 임금의 간청에 마음을 풀고 직에 임했습니다.
 
1596(선조 29) 왜국이 재침할 조짐을 보이자 선조임금은 권율 장군을 다시 도원수에 임명했고, 황여일도 다시 도원수 종사관의 직에 복귀했습니다. 이때 백의종군을 위해 원수부로 내려온 이순신 장군을 만나게 되었던 겁니다.
 
왜란이 끝나갈 즈음인 1598년 명나라의 찬획주사로써 조선에 파견됐던 정응태가 조선이 왜와 손잡고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명제에게 무고한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선조임금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는데요, 정사는 오성과 한음설화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이었고, 부사는 이정구였습니다. 이때 황여일은 진주사(비정규 사절단)의 서장관(외교문서 담당관)에 발탁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됩니다.
서장관 황여일은 이때 한양을 출발해서 북경에 입경하고, 북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180여 일 동안의 여정을 일기와 한시로 기록했는데, “해월문집9~12에 수록되어 있는 은사()(銀槎錄)’이 그것입니다.
은사록은 조선시대 사행 연구의 소중한 자료인데요, 압록강을 건널 때 썰매를 타고 건넜다던가, 봉황산과 서악산, 천비묘 등의 역사유적지에 대한 기록, 요동관리의 뇌물요구, 명나라의 풍속 뿐 아니라 민가의 실상까지 담겨 있습니다.
 
진주사 정사 이항복과 부사 이정구, 서장관 황여일은 임무를 잘 수행하여 명나라 황제의 오해를 풀고 돌아왔고, 길고 길었던 7년전쟁이 끝났습니다. 황여일은 도원수 권율을 도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공을 세웠기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됐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진(戰陣) 생활에 몸이 병들고 종유(腫患)도 앓게 됐으므로 고향 울진으로 내려가서 요양했습니다.
 
1598(선조 31) 임금은 황여일을 세자시강원사서에 제수했고, 사헌부장령을 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양에서 울진까지는 너무도 먼 거리였고, 그래서 조서(詔書)가 황여일에게 빨리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황여일이 발령이 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사은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제수를 취소하고 다른 인물을 찾으려 했습니다. 황여일은 뒤늦게 한양에 올라와서 임금을 입시하고 너무 늦게 사은하게 된 것을 사죄하며 파면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대로 본직에 임하라고 전교했습니다.
 
황여일은 성균관사예, 장악원정,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했습니다. 외직인 예천군수로 나가서는 전후에 정리되지 않고 있던 도적떼들을 모두 토평하여 고을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1611(광해군 3) 황여일은 길주목사에 제수됐는데요, 사간원에서는 길주가 요충지 중의 요충지이므로 무장이 아닌 문신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며 수차례에 걸쳐 교체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황여일이 임진왜란 때 도원수의 종사관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오히려 적임자라며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황여일은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17(광해군 9)엔 왜란 때 잡혀간 우리 백성의 쇄환(외국에서 동포를 데려오는 일) 임무를 띄고 동래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됐고, 대마도와 동래를 오가며 열심히 쇄환을 추진해서 신경난이라는 사람이 돌아오는 등의 성과를 냈습니다.
 
황여일은 울진군 평해읍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됐고, 울진군 온정면 금천리 오패산에 묘가 있으며, 울진 기성면 사동리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사동리에 황여일이 세운 별당 해월헌이 있는데요, 평해황씨 종가인 사동골댁집에서는 황여일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대학언해”, 교지(敎旨), 화살, 모필갑(毛筆匣), 관대 등이 나왔습니다.
저서로는 시문집 해월문집(海月文集)”이 있습니다.
 
참고: “난중일기”(이순신 저, 이정성 엮음. 유페이퍼, 2016, 4,14), “삶에 지치고 좌절한 이들이 읽는 난중일기”(정성 엮음. 유페이퍼, 2015,12,3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해월유록”(이태연 저, 해원문화사. 1999,07,20), <해월헌 황여일의 은사록연구>(권희선,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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