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1일 금요일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신돌석(申乭石)은 구한말 영해에서 의병을 일이키고 일본에 맞서 싸운 의병장인데요,
1878(고종 15) 영해군(지금의 영덕군) 남면 복평리(福坪里) 복디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신태호(申泰鎬)이고, 이명은 신돌석, 신태홍(申泰洪), 신태을(申泰乙), 신대호(申大浩) 등이지만 의병들 사이에서는 태백산호랑이로 불렸습니다. 아버지 신석주(申錫柱)와 어머니 분성김씨(盆城金氏) 사이의 2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2녀는 누나이고, 남동생 신태범이 있습니다.
 



신돌석은 몰락향리의 후예로, 평민의 아들이었습니다. 축산면 축산리의 동갑내기 청주한씨 한재여(1878~1952)와 결혼했는데, 평민이면서도 상원마을에 있는 육이당(六怡堂) 이중립의 서당에서 양반가 자제들과 함께 글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육이당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도중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구한말 일어난 항일의병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주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1차 을미의병이 있고,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 체결한 을사늑약에 반발해 일어난 2차 을사의병이 있으며,
일본에 의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3차 정미의병이 있는데요,
 
3차에 걸쳐 일어난 의병은 대부분이 재지사족(在地士族: 향촌사회의 지배계급을 이룬 양반)이 중심이 되어 이끄는 선비의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영릉의병을 이끌었던 신돌석 의병장은 평민이었고, 그 구성원들 대부분도 평민이었는데요, 그것은 동학 농민운동, 그리고 활빈당 활동의 연장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동학은 경주지방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유불선(儒佛仙)을 융합한 민간신앙 궁궁(弓弓)의 도()’를 발전시킨 민중종교인데요,
궁궁의 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민간신앙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지어진 󰡔정감록󰡕과 조선 중기 남사고가 지은 󰡔격암유록󰡕이 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에서 시작돼 봉건지배와 외세수탈에 항거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했고, 동학접주 전봉준 주도의 농민군이 가세하고 또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동학의 <인내천사상>에 동조하면서 농민전쟁으로 확대됐는데요, 그들은 신분제 철폐와 폐정개혁, 세금제도와 토지제도 개선 등의 12개 개혁안을 요구했습니다. 가담한 단체는 동학당, 남학당, 서학당, 영학당, 북대와 남대, 초적, 의적, 활빈당 등이었습니다.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정부 요청으로 청나라가 원병을 보냈고, 일본은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제멋대로 파병하여 동학농민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일본의 개입은 분노한 민심에 불을 질렀고,
 
 
외세척결을 요구하는 민중까지 가세하면서 동학농민군은 한 때 11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한 무기에 밀리고 관군의 토벌작전도 계속되면서 동학농민군이 서서히 진압되는데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후 다수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남아서 동학당과 활빈당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나라에서 동학잔당 색출과 토벌에 나서자 동학당은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고, 은둔한 채 동학교문의 지도자를 따르며 수련과 은밀한 포교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활빈당도 영양 일월산과 청도 운문산 등으로 숨어들어 활동했습니다.
 
동학당과 활빈당은 1차 을미의병에도 참가했지만 대부분 선비출신 의병장 밑에서 의졸로 싸웠거나 예하에 소속돼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생의병은 평민의병의 활동을 애써 평가 절하했고, 그래서 그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돌석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돌석이 처음 의병으로 활동한 것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1차 을미의병 때였습니다. 신돌석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는데, 김하락 의병장의 예하의진에서 영덕전투(남천쑤 전투, 남천숲 전투)에 참전했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 자세한 활동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영덕전투에 참전한 경주연합의진은 창의대장 김하락 휘하 이준구, 이종흡, 장상홍, 박승교, 이우정 등의 참모와 좌봉장 서두표, 우봉장 이상태, 우선봉 홍병태, 좌익장 안옥희, 우익장 안재학, 중군장 이익화, 후군장 김두병, 좌포장 황성학, 우포장 이시민 등과 박제명 의병장의 축산의진, 신운석의 영덕의진, 김도현의 선성의진, 남석우의 청송의진, 류시연의 임동의진 등의 의병부대였고,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이준구의 경주의진이 주축이었습니다. 신돌석은 그 의병부대 중 어느 한 부대에 소속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경주연합의진은 영덕전투를 마지막으로 더는 싸우지 않고 해산했습니다. 창의대장 김하락이 전사했고,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권고가 내려지자 각 의진이 자진 해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돌석은 이때부터 영릉의진을 일으킬 때까지 약 10년간의 행적이 불분명한데요, 다만 드러난 약간의 행적에서 그의 활동의 대강을 점쳐볼 수는 있습니다.
그는 영덕전투가 끝난 후 영해를 떠났고, 한동안 행적이 묘연한데요, 그러다가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의 어느 때 결혼을 했고, 1903년엔 돌연 청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양 일월산과 청도 운문산은 활빈당 활동 근거지였습니다. 당시의 활빈당은 평등 실현과 빈부격차 타파, 국정혁신을 목표로 활동하면서 곡물수출과 외국상인의 출입금지, 영세행상에 대한 징세 폐지, 농토를 황폐화하는 금광채굴 엄금, 균전법 실시, 곡가안정, 악형 폐지와 인정(仁政) 시행, 농사의 폐해 제거, 일본인에게 철도부설권을 주지 말 것 등의 구국안민팔책(救國安民八策)을 내걸었는데요,
 
청도에 나타난 신돌석은 전선을 가설 중이던 일본 공병을 습격하여 다섯 명을 때려눕히고 동지들과 함께 전선을 뽑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부산에 나타나서 일본상선을 습격하여 배를 수리하던 일본인을 죽이고 배를 부숴버렸습니다. 또 울산 송정리에 있는 박상진의 집에 들렀다가 첩보를 받은 일본군이 몰려와서 포위하자 맞서 싸워 쳐부쉈다고 하는데요,
 
박상진은 의병장 허위의 제자였습니다. 허위의 형 허훈은 당시의 진보군이고 지금의 영양군인 입암면 흥구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흥구리는 남자현의 남편인 김영주가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한데요,
 
허훈은 진보 일대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는데요, 허위도 흥구리의 형을 찾아가서 한동안 지내기도 했으므로 박상진은 허훈의 문하에서도 수학했거나, 적어도 허훈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상진은 그 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지만 경술국치에 울분을 토하며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인물입니다. 후에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됐는데요,
 
신돌석은 그런 박상진의 집을 왜 찾아갔을까요. 울산 박상진의 집에 들렀던 그는 다시 경주로 가서 경주최부자로 알려진 최준의 집에도 들릅니다. 최준의 누나가 바로 박상진의 아내였는데요,
일련의 정황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신돌석은 허훈, 그리고 박상진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고 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1903년 당시 영덕 일대의 활빈당은 김상렬이 이끌었습니다. 김상렬은 신돌석의 최후순간에 함께 있었던 인물인데요, 이런 정황들로 볼 때 신돌석은 행적이 불확실한 10년 동안 동학농민군의 후신인 활빈당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허훈과 박상진, 그리고 영양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도현 의병장은 활빈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도현의 선성의병은 영양에서 통문을 돌렸지만 대부분의 선비들은 조승기 의진으로 가고 반응이 시원찮아서 영양이 아닌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 김도현 의병장이 영양, 안동, 영주, 진보, 영덕 등의 의진의 합진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는 점도, 김도현이 활빈당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김도현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킨 청량산은 활빈당의 근거지인 일월산과 매우 가까운데요, 결국 김도현은 남자현의 아버지인 남정한의 제자들, 그리고 허훈의 제자들 도움을 받아서 선성의병을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후 활빈당을 예하부대로 삼는 방식으로 연대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신돌석은 1904년 울진 평해의 월송정에서,
 
나그네는 누각에 올라 문득 갈 길을 잊네(登樓遊子却行路)
탄식하노니, 단군왕검의 땅을 가로막은 낙목을(可歎檀墟落木橫).
사나이 27세에 이룬 일 무엇인가(男子二七成何事)
가을바람에 잠깐 기대노라니 감개가 샘솟네(暫倚秋風感慨生)
 
라는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06, 을사늑약에 분격하여 영릉의병을 일으킵니다.
신돌석이 의병을 모집하자 순식간에 수백 여 명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요, 주 구성원은 농민과 포수들이고 상당수의 선비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볼 때 활빈당을 후원하는 유생조직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므로 영릉의병은 활빈당 동지들과 그들을 후원하던 선비들로 출범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영릉의진은 신돌석의 아버지 신석주가 내놓은 자금으로 출범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가난한 평민인 신석주가 어디에서 의병을 일으킬 자금을 구한 것일까요? 혹 그 자금의 출처가 허훈과 박상진은 아니었을까요?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영해지역은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활약한 곳인데요, 1871년에 동학운동인 영해민란이 일어났던 곳이죠. 그렇기에 영해는 동학의 중심지이고 본거지였던 것입니다.
 
신돌석이 영릉의병을 일으키자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후 집으로 돌아가서 울진, 영덕, 영양, 청송 등지에 흩어져 살던 동학농민군 출신들은 옛 동지들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가세했고, 그래서 영릉의진은 며칠사이에 그 규모가 배 가까이 불어났습니다.
 
영릉의진 의병장 신돌석은, 통인에 강영이, 참모장 박수찬, 도선봉장 한영욱, 분진선봉장 전세호, 중군장 김용욱, 포대장 신태종, 주작대장 강정흠, 현정대장 강경흠, 유격대장 권두용 등의 간부를 선발해 직책과 임무를 맡기고 의진을 갖추었습니다.
 
 
영릉의진은 상원마을 앞 개천가의 숲에서 훈련하고, 고래산 중턱에서 다시 훈련했습니다. 영해군수(영해군은 지금의 영덕군) 경광국은 자신의 관할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신돌석을 찾아갔고, 의병을 해산하라고 설득했지만 오히려 신돌석에게 설득을 당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릉의병 의진이 갖추어진 후 울진과 영양, 청송 등 인근지역에서 새로 가담하는 의병이 많아서 금방 3~4백여 명 규모로 늘어났습니다.
영릉의병은 또 화약과 탄환을 확보하기 위해 영양으로 가서 관아를 습격하고 신식양총 22자루와 탄환 20, 수철환(무쇠로 만든 탄환) 1발을 확보했고, 읍민들이 내놓은 조총 35자루도 확보했습니다. 또 해안가의 그물추에 다는 납을 헌납 받아 탄환을 만들었습니다.
 
영릉의병은 봉화, 영양, 청송, 의성, 삼척, 정선, 강릉 등을 돌며 일본군과 싸웠고, 그때마다 승리했습니다. 또 울진 평해로 가서 평해골에 주둔한 일본군을 습격했는데요, 크게 놀란 일본군 1천여 명은 도망쳐서 영해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영릉의병은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 이현규가 이끄는 울진의진 등과 연합해 영해성의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이현규 의진이 돌격대를 자청했는데요, 울진의진 돌격대는 서문을 부수고 불을 질렀고, 가장 먼저 성에 뛰어들어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뒤이어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의병 본대가 밀고 들어가서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이 소지한 신식 총과 포 등의 좋은 무기는 원거리에서 싸울 때나 유리하지 백병전에서는 크게 유리할 것 없습니다.
 
 
일본군은 백병전에서 의병에게 일방적으로 밀렸고, 무기를 버리고 성을 빠져나가 도망쳤습니다.
고향 영해에서 일본군을 내모는데 성공한 신돌석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넘어갔고, 휴식을 취하며 다음 작전을 준비했는데요, 민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옷감을 구입해 옷을 지어 의병들에게 입혔고, 소를 사서 의병들을 먹였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수탈해가기 위해 울진 죽변과 삼척의 장호항 등지에 왜관을 설치하고 신식어선과 잠수기 등의 장비를 동원해 대게와 전복, 미역, (토종홍합), 대왕문어, 고래 등 귀한 해산물을 마구 쓸어갔습니다. 원시적 방식으로 어업활동을 하던 우리 어민들은 수십 배의 어획고를 올리는 일본 수산업자들에게 어장을 빼앗기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893년에 이미 삼척 장호항에서 양국 어부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던 터였는데요, 조선 어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나 일본과 친일군수는 강압으로 조선 어민들의 불만을 억압한 채 일본 수산업자들의 어업활동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신돌석은 우리 땅에서 나는 먹거리를 일본인들이 싹쓸이해가는 현실에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우리 민인은 굶주리는데 일본인들은 우리 땅에서 나는 해산물로 배불리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요. 일본의 수탈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 민인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돌석은 일본 어업수탈의 전초기지인 울진 죽변항에서 일본군과 왜관을 철수시키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돌석은 죽변으로 가기 위해 의병을 거느리고 영양에서 울진으로 향했는데요, 그러나 그 정보가 새나가서 울진군수 윤우영은 원주진위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원주진위대는 신돌석의 영릉의병이 오고 있는 길목에 매복했다가 급습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영릉의병은 당황했고, 전열이 흐트러지며 정상적 전투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신돌석은 일단 의병을 거느리고 후퇴해서 청송까지 물러났습니다.
 
신돌석은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울진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죽변항이 아니라 울진군수 윤우영이 그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영릉의병은 울진으로 가서 일본인 집단거주지역을 습격하여 일본인들을 사살하고 집을 불태웠으며, 군자금 15~16백냥 가량을 빼앗았고, 일본헌병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돌아갔습니다. 친일군수 윤우영이 원주진위대를 부른 것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전국의 의병은 경기의병장 허위(許蔿) 주도로 13도의병연합부대(十三道義兵聯合部隊)를 창설하고 한양진격을 준비했습니다. 양도도의장 이강년은 전국의 의병부대 중에서 신돌석의 영릉의병이 가장 강하므로 마땅히 이 연합작전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3도의병연합부대 창의대장에 추대된 이인영은 이강년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돌석을 교남창의대장에 임명하고 동참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유생의병장들이 평민 출신 의병장을 반대했고, 역시 평민 출신인 홍범도(洪範圖), 김수민(金秀民) 등도 함께 배제해버렸습니다. 이강년이 나서서 차라리 내가 물러가고 신돌석을 양도도의장으로 삼아야 한다며 유생의병장들을 설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양진격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 중이던 신돌석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의병을 돌려세웠고, 청송군 진보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호송헌병 4명을 살해하고 군자금을 확보했습니다. 그 다음 달에는 울진으로 가서 관아를 공격해 무기를 빼앗았고, 곧장 삼척 장호항으로 넘어갔습니다. 전 도사(都事) 김하규가 이끄는 삼척의진과 연합하여 장호왜관을 공격했는데요, 장호항 역시 일본어선이 들어와서 조선인 어부들을 밀어낸 지역이었습니다. 영릉·삼척 연합의병은 일본인들을 다수 살해하고 일본 헌병장교와 간부들을 생포하여 돌아갔습니다.
 
신돌석의 영릉의진은 또 영양으로 가서 일본군 헌병분파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과 교전을 벌였고, 관아를 습격해 친일군수를 쫓아버렸으며, 문경으로 가서 일본군을 쳐부수는 등 신출귀몰했습니다.
신돌석은 겨울에 다시 의병을 거느리고 울진으로 가서 관아를 습격했는데요, 친일군수 윤우영을 포박하고 관아를 불태웠고, 경무분파소를 불살랐습니다. 울진읍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소장 등 4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우편취급소도 불살랐습니다. 그들은 곧장 산으로 향했고, 산에 올라 만세삼창을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길로 산길을 걸어 삼척 장호항으로 갔고, 일본인 거주지의 집 40여 채를 불태우고 일본어선 9척을 부수어 바다에 가라앉히고 돌아갔습니다.
 
신돌석과 영릉의병은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일본헌병과 교전을 벌였는데요, 주로 울진과 삼척, 평해 등지의 일본인 왜관이 설치된 지역을 공략하여 수산자원 수탈을 막았습니다. 그것은 조선어민을 보호하고 어획권을 지키려는 뜻이었는데요, 일본의 수탈을 무력화하여 조선 민인의 재산과 양식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의 무장투쟁이 일본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신돌석의 영릉의병은 일본의 수탈을 막아 민인의 생존권을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신돌석이 일본의 수산수탈을 집중적으로 방해하자 일본 수산업자의 어업활동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영릉의병을 토벌하라고 압력을 넣고, 그래서 대구진위대와 원주진위대가 신돌석의 영릉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했습니다.
 
원주진위대 군사 40~50여 명이 영릉의병 은신처를 발견했습니다. 이때 영릉의병은 총을 세워놓고 술을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요, 원주진위대는 영릉의병이 술에 취했으므로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총을 쏘며 급습했습니다. 그러나 영릉의병은 원주진위대 급습을 받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고, 총을 들고 각자의 위치로 가서 싸웠습니다. 그러자 수적으로 밀린 진위대가 오히려 당황했고, 쫓겨 달아나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조선군이 영릉의진을 토벌하지 못하자 일본군이 직접 나섰습니다. 일본군은 백암온천 근처 선미동 길목에 매복했다가 이동 중이던 영릉의병을 급습했는데요, 영릉의병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가 돌연 사라졌습니다. 일본군은 영릉의병이 영덕 쪽 해안도로로 향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추격해갔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울진 선미동에서 사라진 신돌석 의진은 얼마 후 순흥(지금의 영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영릉의병은 이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관아를 공격하고 무기 등을 빼앗았는데요, 이때의 영릉의진은 양총 대여섯 정, 화승총 250~260정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고, 모자라는 탄환은 납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신출귀몰하는 영릉의병을 토벌하지 못하자 한겨울 눈이 내려 영릉의병이 산악지형을 이용하기 어렵고 또 양식을 구하기도 어려울 때 토벌하기로 하고 190711월부터 대대적 토벌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일본군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은 대구진위대 보병 제14연대 1대대장 아카시 소좌에게 기관총 2정과 3개 중대를 거느리고 가서 영릉의병을 토벌하라고 명했습니다. 또 삼척주둔 일본군 제1중대 소속 니시무라 중위가 병력 41명을 거느리고 가세했고, 울진분서 순사부장 스즈키도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가세했습니다. 또 영양수비대의 니나가와 소위의 일본군 소대도 가세했다.
 
일본군은 영릉의병을 영양 일월산에 가두고 1115일부터 1225일까지 40일 동안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도 영릉의병에 별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일본군만 피해를 입자 작전을 바꾸어서 포위만 한 채 고사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영릉의병의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것인데요, 그러나 일월산은 활빈당이 오랫동안 은거한 곳으로, 곳곳에 은신처와 요새가 있고 비상식량도 숨겨져 있었습니다. 신돌석과 영릉의병이 그 요새를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고사책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일월산을 포위하고 두 달이 넘도록 영릉의진을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영주경찰분서장 스즈키와 안동경찰분서장 곤도, 1구 사령관 야마다 소좌, 예천수비대장 고토오 대위 등이 각자의 병력과 경력으로 지원에 나섰습니다.
 
신돌석은 적이 많으므로 뭉쳐서 싸우면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다하고서 각 부대 지휘관 통솔 하에 흩어져 움직일 것을 지시했습니다. 흩어져서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작전이었는데요, 영릉의진은 소규모로 흩어져 일본군을 급습하고 빠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40~50명의 소규모 부대로 여기저기에 나타나서 일본군과 일본경찰을 공격하고 산으로 사라지며 야금야금 피해를 입혔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영릉의병은 무사히 일월산을 빠져나가 평해 백암산으로 옮겨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독실(일명 독곡) 요새가 일본군에 발각되면서 급습을 당하고 60여 명의 의병이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이 영릉의병을 토벌하러 영양으로 몰려가 있는 사이 다른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본 헌병분파소와 경찰분서,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살해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영릉의병 토벌을 포기하고 1908229일 편제를 해체했습니다.
 
 
일제는 1907년에서 11월 중순부터 19082월 말까지 영릉의병 토벌작전을 전개했지만 많은 군력과 경력을 동원하여 큰 희생을 치르고도 신돌석을 사로잡지 못하고 영릉의병도 토벌하지 못하자 신돌석 회유작전으로 선회했습니다. 19083월 세 살 아들 신만이를 데리고 영양군 석보면에 숨어 있던 신돌석의 부인 한재여를 찾아냈고, 안동으로 연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아낙 두 명으로 하여금 한여재의 시중을 들게 했고, 좋은 음식을 준비해 여관으로 모셨습니다. 후하게 대접한 뒤 관직과 많은 돈을 약속하며 신돌석을 설득하라고 회유한 후 항복권유서를 들려서 돌려보냈습니다.
한재여는 돌아가서 남편 신돌석을 만났지만 신돌석은 항복권유서를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고,
어찌 죽지 않고 돌아왔소. 하물며 왜놈의 편지를 가져왔단 말이오!”
하고 부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부인과 아들을 영덕 병곡의 칠보산 서쪽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숨겼습니다.
 
일제는 회유책도 실패하자 신돌석 검거에 황금 1천근과 1만호 고을 조세권 등의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습니다. 신돌석은 자신의 몸에 현상금이 걸린 것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장투쟁을 계속했는데요, 영해의 일본군 주둔지를 습격해 격파한 후 영양으로 넘어가 의진을 정비했고, 삼척으로 넘어가서 소봉동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영양 창수면 희암곡으로 들어가 의진을 정비하며 군자금을 모았고, 530일 울진으로 가서 일본경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불영계곡을 통해 왕피리 쪽으로 후퇴했습니다. 7월에는 평해 한곡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9월에는 희암곡 요새를 급습한 일본군과 싸워서 크게 쳐부쉈습니다. 10월에는 안동군 재산면(지금의 봉화군 재산면)에서 영양 일월산으로 향하다가 길목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과 맞닥뜨렸지만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따돌리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제는 1908년 투항하는 의병들을 면죄처분하면서 회유에 나섰습니다. 그로 인해 전국 의진에서 투항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됐는데요, 신돌석 의진도 마찬가지여서 의병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거기에다 겨울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신돌석은 겨울이 오면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이 다시 개시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래서 의진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신돌석은 또 부장급 지휘관인 이오촌과 이화진 등에게 투항해서 면죄처분 받을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면죄처분 대상이 아니었고,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으므로 곳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습니다.
 
신돌석의 영릉의진은 28개월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러서 대부분을 승리하는 대전과를 올렸는데요, 그것은 대다수 구성원이 농민과 포수 등의 평민출신이어서 체력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산악지형에 적응을 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영릉의진이 수차례 토벌군과 맞닥뜨려 급습을 당하고도 유유히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곤 했던 것은 산을 잘 알고 산악지형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돌석은 영릉의진에 해산명령을 내린 후 어느 날 스승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인 이병국을 찾아갔습니다.
지금 적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고 있는데, 총탄과 화살이 퍼붓는 마당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던 내가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여러 강국에게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
신돌석은 이병국에게 만주 망명을 상의했습니다. 이미 국운이 기울었으므로 국내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으로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병국은 당연히 찬성하고 돕겠다고 했지만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몸으로 어떻게 국내를 빠져나갈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이병국이 신돌석의 망명을 준비하는 동안 신돌석은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동지 김상렬의 집을 찾았습니다. 19081117일이었는데요, 김상렬과 김상근 형제(고종사촌, 또는 김도룡, 혹은 이종사촌이거나 외사촌인 김자성이라는 설도 있다)는 신돌석 몸에 걸린 현상금을 탐내고 독이 든 술을 먹여 독살했습니다. 자정을 넘겨 1118일 새벽 1시 경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요, 31세에 동지에게 피살된 것입니다.
김상렬 형제는 신돌석 시신을 메고 가서 일본군 장교에게 넘겼지만 일본군 장교는 생포해서 오라고 했지 누가 죽여서 오라고 했느냐며 현상금 지급을 거부했고, 그들 형제를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신돌석의 아버지 신석주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일본 헌병에 체포돼 수개월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신돌석의 아우 신태범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김상렬·김상근 형제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신돌석 의병장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무덤은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됐으며,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생가지와 기념관, 흉상, 유허비 등이 있습니다.
 
 
참고: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 광무농민운동과 신돌석 의병(조동걸,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사콘텐츠>(국사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경북인물기행󰡕(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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