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삼은 중 야은(冶隱) 길재(吉再)
길재는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고, 가장의 역할도 해야 했기에 편히 글공부에만 집중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농촌에서 생장하여 미천하기 짝이 없었으며, 겨우 여덟아홉 살에 산나물을 뜯고 양을 길렀다. 나이가 들면서 아침에 일어나 농사짓고 밤엔 글을 읽었는데, <반딧불 비치는 창가(고학)>의 시절 10년 동안 채소반찬에 추운 옷만 걸쳤어도 의연했고, 밭 갈고 김매는 일로 몸이 젖고 발이 더러워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길재가 후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 말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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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버지 길원진(吉元璡)은 고려 공민왕 대에 지방관인 보성대판 벼슬을 지냈고, 그 후 중앙관서의 관직을 역임한 벼슬아치였습니다.
중앙관서 벼슬아치라면 권세도 상당했을 텐데, 그 장자인 길재는 왜 가난했을까요?
그것은 길원진이 조강지처인 토산 사람 김희적의 딸을 버리고 검교군기감 노영의 딸과 다시 혼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광제가 편찬한 시선집 <<동국풍아>>와 김윤명의 시문집 <<정양당문집>>에 길재가 16세에 지었다는 시 <술지(述志)>가 실려 있는데요, 그 시를 보면 길재의 청소년기 생활을 대강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겁니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띠집에 홀로 한가하게 사노라니(臨溪茅屋獨閑居)
달 희고 바람 맑아 흥취는 그만이네(月白風淸興有餘)
외지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外客不來山鳥語)
대밭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 소리 없이 책을 읽네(移床竹塢臥看書)
길재는 청소년기에 대밭이 있는 시냇가 외딴 띠집에 살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 어머니를 모시고 두메산골 띠집에 살며 산나물 뜯고 양을 길러 근근이 입에 풀칠했습니다. 그렇듯 어려운 처지임에도 열한 살부터는 냉산에 있는 도리사라는 절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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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열여덟 살부터는 외가의 도움으로 상산(지금의 상주) 관아의 사록(商山司祿), 사록은 수령을 보좌하는 벼슬인데요, 그 상산사록 박분(朴賁)에게서 학문을 익히게 됩니다. 당시의 학문은 원초유학이었고, 고려에는 이제 막 성리학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길재가 박분에게서 익힌 학문은 당연히 원초유학이었겠지요. 그런데 상산사록 박분도 성리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천재적인 제자 길재가 그 신학문을 익힌다면 틀림없이 대성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박분은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길재에게 자신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정식으로 학문을 익혀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길재는 가난해서 유학을 할 형편이 되지 못했죠. 그래서 길재는 어렵게 용기를 내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아버지 길원진은 개경에서 벼슬을 하며 노영의 딸과 잘 살고 있었는데요, 길재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만 학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로 했던 겁니다. 당연히 어머니는 반대했겠지요. 그러자 길재는,
“있는 아버지를 뵙지 않는 것도 자식의 도리는 아닙니다.”
라고 하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어머니는 길재가 얼마나 학문을 갈망하는지를 잘 알기에 결국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길재는 박분을 따라서 개경으로 올라가 아버지를 찾아뵈었습니다.
아버지 길원진은 다행히 찾아온 길재를 반겨주었고, 편히 학문을 익힐 수 있게 이끌어주었는데요, 길재는 박분의 도움으로 당시 고려에서 가장 학문이 높다고 알려진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물 두 살인 1374년(공민왕 2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길재가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의 성균관 대사성은 이색이었습니다. 이색이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직접 강해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길재에게는 큰 행운이었죠. 길재는 이색의 학문을 계승하고, 또 권근에게서도 학문을 익히며 리학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습니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는, 후에 조선의 왕이 되는 이방원과 동문수학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학문에 매진해서 1383년(우왕 9년)에 사마감시에 합격했습니다.
이때는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이 지금의 충청도 금산군인 금주지사에 부임해 있었는데요, 길원진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재는 금주로 내려가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길원진은 맏아들 길재가 학문에 빠져서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혼인하지 않고 있는 것을 걱정했고, 죽기 전에 아들이 혼인하는 것을 보기 위해 중랑장 신면의 딸 아주신씨(鵝州申氏)와 혼인할 것을 권했습니다. 신면은 매우 부자였고, 그래서 길재가 아무 걱정 없이 학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요, 길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주신씨와 혼인하지만 그러나 처가의 도움을 일체 거부하여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길원진은 그 이듬해에 금산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길재는 아버지를 금산 부리(富利)에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후 개경으로 올라갔고,
1386년 진사시에 응시해 급제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길재를 청주목 사록에 임명했지만 길재는 학문을 더 연구하기 위해 부임하지 않았고, 1387년 성균학정에 임명되자 부임하여 성균관에서 학도들에게 리학을 강학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엔 순유박사(諄諭博士), 다시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이 있었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임금을 사로잡아 강화도로 유배했습니다. 그러자 길재는 반역자들의 불의를 탄식하며,
“몸은 비록 평범하여 기특한 것 없지만 뜻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수양산에서 굶어죽고 싶구나.”
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내비칩니다.
1389년(창왕 1년), 길재는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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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왕 복위를 위해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이색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중 이방원에 의해 장단에 감금되자 길재는 이색을 찾아가 뵙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묻습니다. 그러나 이색은 길재에게,
“나는 대신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마땅히 떠나야한다.”
라고 말합니다. 죽는 것은 높은 벼슬의 우리가 할 테니 젊은 학자는 벼슬에서 물러나 목숨을 보전해서 도학, 즉 리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길재에게 한 편의 시를 지어 건넸습니다.
뜬구름 같은 벼슬 급급할 것 있으랴(軒冕儻來非所急)
큰 기러기 날아가면 막막한 어둠뿐이리(飛鴻一箇在冥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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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 옛집으로 돌아갔고, 예순을 넘긴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 남쪽 구며리로 이사했습니다. 몸소 어머니의 잠자리를 보아드리고 밥상을 차려 올리는 등 극진히 봉양했습니다.
길재는 벼슬에 있을 때 청렴했으므로 척박한 약간의 농토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난해서 자주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예전 벼슬할 때 장만한 관복까지 내다팔았지만 그 사실을 어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굶주리면서도 어머니께는 늘 맛난 것을 구해드렸다고 합니다.
국가찬탈을 기도하던 이성계 일파는 부패한 불교 때문에 고려 왕조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으므로 성리학적 민본사상을 표방하며 자신들이 새로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파하려고 애썼는데요, 그렇지만 정작 성리학자 대부분은 절의파 쪽으로 돌아섰고, 이성계를 따르는 학자는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 극히 일부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고향으로 내려간 길재를 계림교수에 임명하며 회유합니다. 그러나 길재는 사양합니다. 그들이 다시 안변교수에 임명하고 불러도 길재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1389년 12월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으로 보내 우왕을 죽였고, 예문관대제학 유구를 강화로 보내 창왕마저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길재는 통곡하며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상복을 입고 3년 동안 채소와 과일과 젓갈을 먹지 않았습니다. 스승들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같이 행했다고 합니다.
1392년, 정몽주가 격살되었고,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하고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혁명도 반역도 임금을 바꾸는 일이지만 혁명은 백성이 원해서 바꾸는 것이고 반역은 권력을 탐해서 바꾸는 것입니다. 역성혁명이라는 말은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 스스로 붙인 말이고요, 백성과 함께하지 않고 권력자들끼리 짜고 고려를 무너뜨렸으므로 당시의 학자와 신료들 상당수는 반역으로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는 두문동 72인의 일입니다. 고려가 망하자 72인의 충신들이 조선을 이성계의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바깥세상과 연을 끊었고, 그래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정선칠현으로 불리는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沖漢), 신안(申晏), 이수생(李遂生),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 고천우(高天祐) 등은 오지 정선 땅으로 숨어들었고요, 남사고의 조상인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남영번(南永蕃)은 울진으로 숨어드는 등 수많은 문헌에 벼슬을 버리고 은자의 길을 걷게 되는 문신과 무신들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성계 일파가 혁명이 아닌 반역으로 고려를 무너뜨렸다고 보았기에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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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의 시문집인 <<야은집>> <후산가서(後山家序)>에는,
<힘써 밭 갈고 학문을 닦아 아래로는 어버이를 봉양하고 위로는 임금을 섬겨서, 어버이는 즐겁게 하고 임금은 요순이 되게 하며 백성은 당우(唐虞)의 세상에 살게 하는 것. 그 삼대(三代)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내 평소의 뜻이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요순>은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과 순임금이고, <당우>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린 나라 당요와 우순, <삼대>는 요순의 이념을 계승한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시대를 말하는 건데요,
그 뜻이 좌절되어 은자의 길을 걷게 된 길재는, <족몽중련구(足夢中聯句: 깊은 꿈속)> 라는 시를 지어 암울한 시대를 한탄합니다.
고금의 동료와 벗들의 신분이 새롭게 바뀌어(古今僚友身新變)
천지강산은 죽은 사람의 그것 같구나(天地江山是故人)
태극의 주재자가 응하여 내게 허락한다면(太極眞君應許我)
인자한 마음 영원하여 저절로 푸르게 하련만(仁心不老自靑春)
역성혁명파의 무자비한 폭력성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고, 자신에게 그것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음을 한탄한 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을 말릴 수 있는 것은 태극의 주재자, 즉 하늘뿐이라는 얘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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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는 제자들을 받아들여 정주의 학설을 강론했습니다.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도 이때 길재 문하에서 수학하고 후에 많은 리학자들을 길러내게 되죠. 또 그 문하에서 수학한 전가식은 1399년(정종 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게 됩니다.
길재가 너무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수조차 없게 되자 선산군사 정이오가 1395년(조선 태조 4년) 오동동에 있는 묵은 밭을 주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1398년 요동정벌을 이유로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권을 박탈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정안군(靖安君) 이방원 일파가 살해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원 일파의 승리로 정도전 일파가 지원하던 세자 의안대군(宜安大君), 대군은 정비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이죠, 그 의안대군 이방석(李芳碩) 또한 폐위되어 귀양을 가던 중 이숙번에 의해 살해됩니다.
정안군 이방원은 세자에 추대되지만 동복형인 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에게 사양합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양위를 받아내 영안군이 왕위에 오르죠. 바로 정종입니다.
2년 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주도의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데요, 이방원은 이를 제압하고 세자에 책봉됩니다. 이때의 임금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었지만 실질적 국정은 세자인 이방원이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전년에 장원급제한 전가식이 세자관속(世子官屬: 후에 세자시강원) 정자(正字)로 봉직 중이었는데요, 그 전가식이 세자와 초야에 묻힌 선비를 찾아 등용하는 유일(遺逸)을 의논하다가 스승 길재를 천거합니다.
이방원은 예전 성균관에서 길재와 동문수학했으므로 길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군부(三軍府)에 명하여 길재를 역마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길재가 올라오자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제수하려 했는데요, 그러나 길재는 상서를 올려서,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그 옛 정을 잊지 않아서인 줄 압니다. 하나 저는 이미 공양왕이 섰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옛 정으로 부르시니 뵙고 제 뜻을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올라온 것이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저의 뜻은 아닙니다.>
라고 하며 조선에서는 벼슬할 뜻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때 이방원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개경을 둘러보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依舊)되 인걸(人傑)은 간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이런가 노라
라는 시조를 지었습니다.
길재의 상서를 읽어본 이방원은,
“그대가 사람의 도리를 말하고 있으니 바꾸라고 할 수 없고, 그 뜻을 빼앗지 않는 것이 의에 부합한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주상이니, 주상께 아룀이 마땅하다.”
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길재는 다시 임금께 전문(箋文: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글)을 올려서,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을 두지 않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더이다. 신은 시골 태생으로 고려의 신하되어 벼슬을 살았는데, 다시 또 조선의 조정에 출사하여 풍교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향리로 돌아가게 하여 두 성(姓: 고려의 왕 씨와 조선의 이 씨)의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신의 뜻을 이루게 하고,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소서.>
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전문을 받아 읽은 정종은 경연에서 권근에게 그 처리를 물었고, 권근은 벼슬과 작위, 녹봉을 더해주어서라도 붙잡아야 마땅할 것이나 그래도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억지로 굴복시키지 말고 돌려보내서 스스로 복종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아뢰었습니다. 임금은 권근의 말에 따라 길재에게 더 높은 벼슬을 제안하며 입사(入仕)할 것을 청했지만 길재의 뜻은 완고했습니다. 정종은 길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고, 그 집안의 세금과 군역 등을 면제해주는 복호(復戶)를 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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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태종 2년) 길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인 길사문(吉師文)마저 죽었습니다. 길재는 여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했습니다.
길재는 1414년 자신의 몸이 병들자 금산으로 갔고, 아버지 길원진의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419년(세종 1년) 4월 12일 6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손들이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가서 낙강(洛江) 서쪽 오포(烏圃)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지금 보시는 무덤이 길재 무덤입니다.
해가 져서 무덤을 찾았으므로 사진이 좀 어둡게 나왔습니다.
묘는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데요,
그 근처에 지금 보시는 <지주중류비>가 있습니다.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내에 고려삼은을 기리는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이 있는데요, 1394년 길재가 동학사에 단(壇)을 모아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 그리고 정몽주의 초혼제를 지냈던 곳인데, 1399년 류방택이 그곳에 이색을 추가 제향했고, 1419년 길재가 세상을 떠나자 류방택의 아들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 제향했습니다. 1421년 류방택 류백순 부자가 주도하여 이색, 정몽주, 길재의 고려삼은을 합사하는 삼은각이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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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세종 8년) 길재의 제자들 건의로 조정에서는 길재를 좌사간대부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습니다. 또 삼강행실도에 충절의 표본으로 정몽주와 함께 길재를 수록했습니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김취문과 최응룡이 금오서원을 지어 그 충절을 추모했는데요,
지금 보시는 사진이 금오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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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선조 6년)에는 후손들에 의해 야은선생 행록이 편찬됐으며, 1574년엔 류성룡의 형인 현감 류운룡이 묘 옆에 오산서원을 지어 제향했습니다.
1739년(영조 15년)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후일 김종직은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라는 선산지도를 만들고 길재, 김선궁, 냉산, 도리사(桃李寺) 등 선산을 대표하는 인물과 경관 열 가지에 시와 해설을 곁들인 <선산십절(善山十絶)>을 지어 덧붙이는데요, 그 중 길재를 노래한 <야은고거(冶隱故居)>를 보겠습니다.
오산과 봉수를 마음껏 거닐었음이라(鳥山鳳水恣徜徉)
야은의 맑은 바람 더욱 길어 즐겁구나(冶隱淸風說更長
밥 짓는 종들도 시로써 서로 다투었다니(㸑婢亦能詩相杵)
지금 사람들은 정공향에 견준다네(至今人比鄭公鄕).
<야은의 맑은 바람>은 길재의 학문을 말하는 거고요,
<정공향>은, <<후한서>> <정현전(鄭玄傳)>에 따르면, 국상(國相) 공융(孔融)이 정현을 특별히 존경하여 정현을 위한 마을을 하나 세우고 정공향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참고: 불사이군의 충절(김용헌 저, 예문서원. 2015,12,22), 「야은 길재의 도학사상과 그의 출처관」(김인규, 영산대학교 연계전공학부 교수), 「조선시대 길재 추숭과 출처의리」(김훈식,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길재의 강상론과 처세관」(정성식, 영산대학교 교수),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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