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7일 월요일

단종의 충신,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


 
 

1456(세조2) 집현전학자들인 성삼문(成三問)과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했으나 김질(金礩)과 그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배신으로 발각되어 사육신이 처형을 당하는 <병자사화(丙子士禍)>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삼군 도진무사(三軍都鎭撫事)를 지낸 최시창(崔始昌) 등과 함께 영남 선비들을 모아서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두 고갯길을 막고 단종 복위를 선포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보흠이 영남 선비들에게 돌리려고 작성해놓은 격문을 금성대군의 시녀가 훔쳐서 달아나버렸고,
기천현감(基川縣監: 기천은 지금의 풍기)이 쫓아가 시녀에게서 격문을 빼앗고는 그것을 들고 세조에게 달려가는 바람에 금성대군의 계획도 발각되어 금성대군과 이보흠, 최시창 등 수백 명이 처형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세조는 1457(세조 3) 6월 단종을 상왕에서 폐하고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시킵니다.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된 임금 단종(端宗). 사람들은 세조가 두려워서 아무도 단종을 찾지 않았는데요, 유일하게 영월관아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만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上王)으로 밀려났다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 온 단종을 날마다 찾아뵙고 위로하며 말벗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외로웠던 단종은 그런 엄 호장이 많은 위로가 되었고, 그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억울한 세월을 견뎠던 듯합니다. 영월관아 동헌의 누각인 <자규루(子規樓)>에서 시를 지어 엄흥도에게 읊어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니까요. 그 시를 <출제궁(出帝宮)>이라고 하는데, 전문은 이렇습니다.
 
一自寃禽出帝宮
궁궐을 쫓겨난 임금은 한 마리 원통한 새와 같아서
孤身隻影碧山中
짝지을 그림자도 없이 산중에 홀로 섰구나
假眠夜夜眠無假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
두견새 울음 끊긴 새벽 산봉우리 달은 밝은데
血流春谷落花紅
피눈물 흐르는 듯 봄 골짜기 낙화는 붉기도 하다
天聾尙未聞哀訴
하늘도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슬픈 사연
胡乃愁人耳獨聰
어찌하여 수심 가득한 사람 귀에만 들리는 것일까.
 
이 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찬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엄홍도는 영월관아 호장으로, 일개 아전일 뿐이었습니다.
호장은 지방 관아의 6방 중 우두머리로, 사또를 보좌하고 6방을 지휘하는 역할을 했는데요,
그렇다면 영월군수는 엄 호장이 폐위 임금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포학한 성품의 새 임금 세조가 임명한 군수였을 텐데, 부하 아전이 폐위 임금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틀림없이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 텐데도 영월군수는 엄홍도 호장이 단종을 찾아가 만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의 영월군수가 안 말린 것이 아니라 못 말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만큼 호장의 힘이 막강해서 수령도 어쩌지 못했을 수 있었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중앙관청의 아전을 경아전이라고하고 지방관아의 아전을 외아전이라고 하는데요,
신임 수령이 임지에 부임할 때는 외지에서 의생(醫生)과 공생(貢生) 율생(律生), 서원(書員) 등의 행정관인을 데려 가게 되는데, 그들을 일컬어 가리(假吏), 혹은 가향리(假鄕吏)라고 합니다. 수령은 간혹 그 가리 중에서 6방 중 일부 직임을 맡기기도 했는데요, 수령이 데려온 사람이므로 당연히 그 신임도 두터울 것이고, 따라서 6방 중에서 그 영향력도 막강했겠죠?
 
그렇지만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수령이어도 호장만큼은 자기 사람을 쓰지 못하고 그 지역 토착아전에게 맡겼습니다. 수령을 보좌하는 호장이기에 그 지역을 잘 알아서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 있고, 또 토착세력으로부터 수령을 보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할 테니까요.
 
그러므로 호장은 단순한 지방 관아의 아전이 아니라 지역 토착세력과 관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그 영향력도 막강해서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호장이 협조하지 않아서 수령이 관할 토착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 좋을 것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당시의 영월군수가 폐위 임금과 친하게 지내는 엄홍도 호장을 말리지 못하고 모르는 척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조는 단종을 영월로 유폐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서 단종에게 자살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해 1024일 단종은 결국 누군가에게 시해를 당합니다. 그 시신은 청량포 강가에 버려졌고요.
 
이때의 단종은 노산군(魯山君)도 아니고 이홍위(李弘暐)라는 이름을 가진 한낱 서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알면서도 포학한 세조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서 감히 장사를 지내주지 못했고, 애도조차 하지 못한 채 모두 외면했습니다. 다만 영월호장 엄홍도만이 지역의 유력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단종의 장사를 치러주자고 호소했는데요,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다가 큰 화를 입을 거라며 모두들 엄 호장을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 호장은 <爲善被禍 吾所甘心(위선피화 오소감심)>,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한다면 기꺼이 감내하겠다>라고 하며 관을 마련했고, 아들 엄광순에게 그 관을 지여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통곡으로 단종의 승하를 세상에 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들과 둘이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고,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冬乙旨)라는 곳에 장사지냈습니다.
그 후 엄홍도는 가족들을 모두 거느리고 경상도로 달아났는데요, 그 후손들은 경상도 일대를 떠돌며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1516(중종 11)에 임금이 영월군수 박충원에게 명하여 단종의 묘를 찾게 했고, 묘를 정비한 후 제사를 지내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임금이)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致祭: 윗사람이 사람을 보내서 아랫사람을 제사지내게 하는 일)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능을 지킬 군사를 정했고 또 내신(內臣: 승지)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이 심히 애통히 여겼다.
(……중략)
다시 이르되, 신상이 돌아와 결과를 아뢰고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가에 있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총총한 여러 무덤 사이에 있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승하하셨을 때 온 읍내가 당황하였지만 군의 엄흥도(嚴興道)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관을 갖추고 찾아가 곡하며 장사지냈습니다. 하여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고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서 1669(현종 10)이 되었습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현종임금께,
 
<노산군이 살해되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는데 군의 아전 엄흥도는 즉시 달려가서 곡했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하여 염하고 장사를 치렀습니다.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것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는데, 지금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자손들이 혹은 본군(영월)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괴산(槐山)에 있다고도 합니다. 그 절의를 높이 사서 장려하는 것이 도리인 바, 그 자손들을 등용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라고 아뢰었고, 임금은 담당 관서에, 그 자손을 찾아보고 관직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1698(숙종 24) 11월에야 묘호가 단종으로 정해지고 능호(陵號)도 장릉(莊陵)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엄홍도는 정육품인 좌랑 벼슬에 추증됩니다.
 
  
1728(영조4)에는 특진관(特進官) 여필용(呂必容), 엄홍도는 자손이 없어 외손이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엄홍도의 충절이 특별하니 그 외손들에게 특별히 호역(戶役)을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복호(復戶)를 청했고, 영조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대대로 군역을 면제하고 호역도 면제하라고 하교했습니다.
1743(영조 19)에는 예조 참판 이주진(李周鎭) 청원으로 영조임금은 엄홍도에게 하대부(下大夫) 벼슬에 추증하라고 하명하고, 엄홍도는 공조참판에 추증됩니다.
1755(영조 32)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별묘와 사당 상절사(尙節祠)가 건립되었는데요, 이 상절사는 1833(순조 33) 의산서원(義山書院)으로 승격되었다가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됐고, 1900년 다시 건립되어 그 이름을 상의재(尙義齋)로 하고 충절사(忠節祠)라는 별묘에 위패를 모셨습니다.
 
상의재와 충절사는 문경에 있는데요, 문경에 가시면 한 번쯤 들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1758(영조 34)에는 사육신 서원(書院) 육신사(六臣祠)에 함께 배향(配享)하라는 영조임금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서 1876(고종 13)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영월 여행을 가시게 되면 충의공 엄흥도 기념관과 무덤, 정려각 등을 찾아보시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 <대한민국 구석구석>,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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