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일 화요일

역사의 숨은 영웅 최춘명


  
 
고려 고종 대에 최춘명이라는 충신이 있었습니다.
무신정권이 집권하던 고종 연간에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지역인 자산(慈山), 즉 자주(慈州)의 부사(副使)를 역임한 분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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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고종 안효대왕> 19(1232) 기사에,
 
<여름 4월에 재추(재추는 재부에 속한 2품 이상의 재상들인데요, 재추)들을 대관전(大觀殿)에 불러 모아 자주부사 최춘명(崔椿命)의 죄를 논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주부사 최춘명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재추회의에서 그 죄를 논하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고종 37(1250) 기사에는,
 
<추밀원 부사 최춘명(崔椿命)이 졸하였다. 춘명은 몽고의 난리 때에 자주를 지키어 항복하지 않고 시종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논공에서 제일이었다.>
 
라는 추밀원 부사 최춘명 졸기가 있습니다.
13년 전 재추회의에서 죄를 논했던 죄인이 후에 공을 논할 적에는 일등공신이었고, 왕명출납기구인 추밀원의 부사에까지 올랐다는 얘기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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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몽고의 난리>1231(고려 고종 18)에 일어난 전쟁인 <1차 몽고 침입>입니다.
 
칭기즈칸(成吉思汗)의 뒤를 이어 1229(고종 16) 황제에 즉위한 오고타이(太宗)
사르타크(撒禮塔)를 원수에 세워서 고려를 침공했고, 의주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성(鐵州城: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는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하며 남하했습니다. 그러자 고려는 각 지방의 군사를 불러 모아 황주(黃州)의 동선역(洞仙驛)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몽골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안북성(安北城: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에도 지원군을 보내서 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안북성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는 바람에 고려군은 방어선이 무너졌고,
겁기야 개경이 몽골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몽골군은 개경을 포위한 채 지키는 군사 없는 고려 땅을 마음껏 활보했고, 충주까지 남하하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하자 고려는 일단 몽골군을 고려 땅에서 내보내기 위해 화친을 제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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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몽골군 원수 사르타크는 고려 서북면 14개 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것을 화친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고려 서북면 14개 성의 민정을 간섭하겠다는 뜻이었는데요, 이는 고려의 서북면을 몽골에 복속시켜서 고려가 복종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땅을 아주 빼앗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죠. 그럼에도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내건 그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단 몽골군을 고려 땅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급했으니까요.
 
그런데 서북면 14개 성 중 최춘명이 지키고 있는 자주성은 이때까지도 몽골군이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몽고에서 자주성을 에워싸므로 춘명이 이민(吏民)을 거느리고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최춘명이 자주부사로서 1차 몽고 침입 때 자주성을 잘 지켜낸 것만은 분명한데요,
성을 잘 지켜낸 부사에게 안효대왕 고종은 왜 재추회의에서 죄를 의논하라고 명했던 것일까요?
 
당시는 무신이 집권하고 있었고, 최고집권자는 최우(崔瑀)였습니다.
최우는 삼군(三軍)에 항복할 것을 명했고,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은 성에도 성문을 열고 몽골군에 항복할 것을 명했습니다. 최고집권자의 명에 따라 고려 삼군의 장수들이 모두 항복했고, 서북면의 각 성에는 몽골에서 온 다루가치가 배치되었죠.
 
그러나 자주성을 지키던 최춘명만은 굴욕적 항복은 있을 수 없다며 최우의 명을 거부한 채 성문을 열지 않았고, 포위하고 있는 몽골군에 계속 항전하면서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를 성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최우는 몽골군을 일단 고려 땅에서 내보내야 하는데 최춘명이 항복하지 않아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내시낭중(內侍郎中) 벼슬의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서 일단 항복하고 성문을 열고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를 받아들이라고 자주부사 최춘명을 설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최춘명은 송국첨이 성문 앞에 와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나가보지 않았고, 성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송국첨은 어찌 변성의 장수가 조정이 정한 일에 따르지 않는 거냐며 거친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습니다.
 
고려의 모든 군사가 항복했지만 자주성의 군사만 항복하지 않고 버티자 몽골군 원수 사르타크는 고려 왕족으로서 화친을 주도하고 있는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에게, 자주(慈州)가 항복하지 않으면 개경 포위를 풀 수 없다며 강한 불만을 표했고,
최춘명에게 사자를 보내서 항복하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에 회안공은 최우와 의논하고 최춘명의 직속상관인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大集成, 太集成)을 자주성으로 보내서 최춘명을 다시 설득해보라고 했습니다.
대집성은 최우의 명에 따라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와 함께 자주성으로 갔고, 최춘명에게 성문을 열 것을 요구했습니다.
직속상관이 오자 최춘명은 예의상 성루로 나와서 인사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성문은 열지 않은 채 목소리 큰 부하를 시켜서 대집성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습니다. 대집성 또한 목소리 큰 사람을 통해 항복을 권하러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최춘명은 조지(朝旨: 조정의 명령서)를 가져왔는지 물었고, 대집성은 왕족인 회안공의 명임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최춘명은 교지, 혹은 조지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장군의 말만 믿고 항복하겠느냐며 성문 열기를 거부했습니다. 대집성이,
 
<이미 회안공의 항복 요청으로 삼군 역시 항복하였음이라. 이런데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최춘명은,
 
<우리 성의 사람들은 회안공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라고 하며 끝내 거절하고 성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몽골 다루가치가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호통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최춘명은 좌우 무사들을 시켜서,
 
<저 놈이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라!>
 
하고 명했고, 그 명에 따라 궁수들이 몽골 다루가치를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몽골 다루가치가 크게 겁을 먹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서경(西京)으로 달아나버렸는데요,
대집성도 일단 서경으로 돌아갔지만 서너 번을 더 자주성으로 가서 최춘명을 달래며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최춘명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고, 때문에 대집성도 감정이 크게 상해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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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대집성으로부터 자주성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몽골군 원수 사르타크는 대로했고, 최춘명을 죽이지 않는 한 철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회안공과 최우는 최춘명에 관한 일을 안효대왕 고종께 아뢰며 왕명으로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간하게 되었습니다.
얘기를 들은 고종은 최춘명은 나라를 굳게 지킨 죄밖에 없는데 어떻게 벌을 내릴 수 있겠느냐며 근심했습니다. 그러자 좌우 신하들은 일단 사르타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최춘명의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으니 죄를 묻기는 하되 벌은 가벼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종이 재추회의에 최춘명의 죄를 의논하라고 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재추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집성은 최고실권자인 최우를 찾아갔고, 최우에게,
 
<최춘명의 죄를 왕과 재추들이 다 망설이고 결단하지 못하니 공이 독단으로 그를 죽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최우는 자신이 최춘명을 죽이겠다고 왕에게 아뢨는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승단(兪升旦)은 어떤 이유로든 나라를 지킨 충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최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춘명을 죽이라는 조지를 들려서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서경(西京),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죠. 서경으로 파견했습니다. 이에 이백전은 군사를 거느리고 자주성으로 가서 최춘명에게 조지를 보여주며 순순히 조정의 명을 받들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최춘명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나와서 포박에 응했는데요, 그러나 말과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했다고 합니다.
 
내시 이백전은 최춘명을 체포하여 서경으로 갔고, 죽이려고 했는데요,
그것을 본 몽골 다루가치 중 하나가 잡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백전은,
 
<자주수령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자주성으로 갔다가 최춘명으로부터 화살 세례를 받았던 몽골 다루가치가 깜짝 놀라며,
 
<우리 입장에서는 명을 어긴 죄인이나 그대나라 입장에서는 충신이기에 우리도 죽이지 않았던 것이오. 그런데 이미 우리와 화의를 맺은 마당에 그대나라가 그대나라 성을 온전히 지켜낸 충신을 죽인단 말이오?>
 
라고 했고, 그건 결코 의로운 일이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석방을 청원했습니다. 이에 몽골군 원수 사르타크도 분노를 풀었고, 안효대왕 고종은 왕명으로 최춘명을 석방했습니다.
 
최춘명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몽골군이 물러간 후 논공에서 1등공신이 되어 후에 추밀원 부사까지 올랐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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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연간에 활동한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98(선조 31)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봉직하고 있었는데요, 조정의 명으로 고려 충신 최춘명과 정의(鄭顗)를 향사하는 사당 <무학사(武學祠)>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성천 무학사에서 서 관찰(평안도관찰사 서성(徐渻)을 일컬음)의 시를 차운하다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盛烈湮沈久莫尋(성대하고 굳센 인멸 오랜 세월 탐색하여 찾아내니)
一朝輝赫耀江潯(아침 강가의 찬란한 빛을 얻음이라)
若非萬古彝倫重(만일 만고의 인륜을 엄중히 지키지 않았다면)
爭奈千年耳目欽(천년 뒤 흠앙하는 이목 어찌 있었으리)
奔走恪恭惟上命(이리저리 바쁜 중에 삼가 공손히 어명을 받드나니)
咨嗟涕泣是何心(탄식으로 눈물짓는 이 마음 어찌할꼬)
想應異日摩挲處(훗날까지 응당 매만져질 곳)
如聽階間贊相音(지금처럼 계단 오르는 소리 끊이지 않으리라)
 
이 시는 한강 정구의 시문집인 <<한강집(寒岡集)>>에 실려 있는데요.
최춘명과 정의, 두 분 충신의 잊혀진 역사를 발굴해낸 것이 정구 자신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두 분 충신의 빛나는 얼이 후대에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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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 11년 윤27일 임금은 최춘명과 홍명구의 신주가 모셔진 사우(祠宇)<의열사(義烈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그 의기를 기렸습니다.
 
 
 
이상 전은강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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