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7일 목요일

동편제의 대가 박록주(박녹주), 그녀를 사랑한 소설가 김유정

 
 

 
<너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밤새도록 고려관 앞에서 너를 기다렸다. 네가 나오면 죽이려고 네 그림자를 찾아도 너를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나를 만나주지 않을 때는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누구든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혈서라면 더욱 등골 오싹하겠죠.
이 혈서는 놀랍게도 <봄봄>, <동백꽃>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이 보낸 것이었고,
수신자는 박록주(박녹주)라는 판소리 명창이었습니다.
박록주는 판소리 중에서도 동편제(東便制)로 큰 인기를 얻은 동편제의 대가였는데요,
서편제는 늘어지고 세밀한 묘사로 이루어지는 반면 동편제는 힘찬 성음과 분절되는 장단으로 시원시원하다는 특징이 있죠.
서편제에서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니리를 구사하고, 동편제에서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니리를 구사하죠. 그래서 동편제는 주로 영남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는데요,
박록주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딱 부러지게 맺고 끊는 창법의 웅대한 느낌으로 동편제의 멋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요즘의 연예인들은 소속사라고 하는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데, 당시의 기생명창들도 소속사가 있었습니다. 기생조합을 권번이라고 했는데요, 요즘 연예인들이 소속사로부터 훈련을 받고 관리를 받듯이 당시에도 권번에서 기생교육을 시키고 스케줄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을 권번예기(券番藝妓)라고 했는데,
박록주도 권번예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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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는 당대의 유명한 명창들로부터 동편제를 전수받았고, 1백 회가 넘는 방송출연과 60매 넘는 음반을 취입했으며, 주연을 맡아 수많은 공연활동을 펼쳤습니다.
 
박록주의 아버지는 박재보(朴在甫)이고, 어머니는 권순이(權順伊)인데요,
박록주는 32녀 중 맏딸이었습니다.
1905년 선산(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박명이(朴命伊)이며, 호는 춘미(春眉), 예명은 박록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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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재보가 박수무당이면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소리선생이기도 했기에 박록주도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소리의 기본을 배웠습니다. 그런 다음 열두 살 되던 해인 1916년 동편제 적벽가의 대가인 박기홍에게서 "심청가""춘향가" 일부를 전수받았는데요, 참기름을 먹어가며 하루 스무 시간 이상씩 목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2년 후에는 기녀단체 <협률사>에 소속되어 김창환과 김봉이로부터 토막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 다음 강창호에게서 "심청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데와 단가 고고천변을 배웠고, 김점룡, 지진영 등에게서 남도민요와 육자배기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920, 마침내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를 하며 본격 소리꾼으로 데뷔하게 되는데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남백우가 후원자로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말이 후원이지 실은 소실로 삼고서 돈으로 그 활동을 지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박록주보다 열아홉 살 연상이었던 남백우(1886~1946)는 박록주가 서울로 가서 소리공부를 할 수 있게 후원했는데요, 덕분에 박록주는 1922년 서울로 가서 국창 송만갑에게서 단가 진국명산, 그리고 "춘향가"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 전수받습니다. 그리고는 이듬해에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관객들로부터 끝없는 앵콜 요청을 받으며 중앙무대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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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회에서 박록주를 특히 눈여겨본 노신사가 있었습니다. 김경중이라는 사람인데요, 김경중은 당시 물산장려운동과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동아일보사> 사장 김성수의 아버지입니다. 김성수는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죠.
그 김성수의 아버지 김경중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녀의 재능 하나만 보고서 후원을 자청합니다. 그녀 개인에 대한 애정보다는 국창에 대한 애정이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3천원의 거액을 들여서 그녀에게 수운동의 한옥을 한 채 사주고 국창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대회에서 김경중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조선극장> 지배인인 신 모 씨도 알게 되고, 신 모 씨의 구애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백우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신 모 씨와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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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는 여러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고, 유명세를 타면서 1926년부터는 여러 방송국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더욱 명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일동축음기주식회사 <제비표레코드>에서 "한송정", "꽃사거리", "소상팔경" 등의 음반을 취입하고, 또 코리아레코드, 폴리돌레코드, 시에론레코드, 콜럼비아레코드 등에서도 음반을 취입하여 돈도 많이 벌게 됩니다.
 
이 즈음, 그녀의 공연을 보고 그녀에게 반해버린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그 젊은이는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로 달려와서 그녀에게 만나달라고 애원을 하는데요,
그 젊은이는 후에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될 김유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극성스런 열혈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말을 걸어오는 김유정에게 목례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김유정은 진지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사생팬이 되어 집요하게 스토킹을 하게 되는데요,
 
(……전략)
저의 고향은 춘천이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중략)
저는 누님 집에서 숙식하며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는 스물두 살 학생입니다.
(……중략)
당신을 연모합니다.
 
김유정은 그녀의 주소를 알아내고 고백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잘못 온 편지라 생각하고 반송하는데요, 당시 박록주라는 예명을 쓰는 또 다른 화초기생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가야 할 편지가 자기에게 잘못 배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김유정은 잘못 보낸 편지가 아니라 그 박록주에게 보낸 것이 맞다는 뜻으로 그녀의 사진을 동봉해서 똑 같은 편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박록주는 신 모 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으므로 김유정의 팬레터에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김유정은 답장 없는 편지를 거의 매일 같이 써서 부쳤습니다.
 
아무리 편지를 써도 그녀의 답장이 없자 김유정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서 집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김유정은 술을 마시고 무례한 언어를 사용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나는 술로 밤을 새운다. 술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지금쯤 너는 어느 요정에 가서 소리를 하고 있겠지. 이 추운 밤에 홀로 술을 드는 나를 생각해보라. 사랑이란 것은 억지로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뭣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너를 생각한다.
-나의 이력서(한국일보, 1974, 01, 25) 중에서
 
그래도 박록주의 대답이 없자 편지는 점차 협박조 내지는 폭력조로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겁기야 죽이고야 말겠다는 혈서를 써서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유정의 편지를 협박으로 받아들인 박록주는 겁을 먹고 더욱 김유정을 피해 다니게 되는데요,
이때 박록주와 친하게 지내던 후배 원채옥이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며 만나서 담판을 지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박록주는 집으로 김유정을 불러서 만나고 좋은 말로 타일러보는데요,
그렇지만 김유정은 오히려 그녀가 아니고는 다른 사랑을 할 수 없다며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애원합니다. 박록주가 자신은 천한 기생이고 나이도 많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사랑에 귀천이 어디 있으며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는 김유정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죠.
 
그런데 이 즈음, 박록주는 동거하던 조선극장 지배인 신 씨와 불화를 겪고, 결국 헤어집니다. 신 씨가 박록주 돈으로 영화 <킹콩>을 수입했다가 흥행에 실패해서 박록주에게 많은 빚을 안긴데다, 바람까지 피웠기 때문인데요, 거기에다 말 못할 가족들의 문제까지 생겨서 박록주는 크게 낙심했고, 겁기야 자살을 결심하고 위스키를 마시고 수면제 서른여섯 알을 삼킵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돼서 만 이틀이 지나 깨어났는데, 그 사건은 <대한매일신보>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신문을 읽고 박록주의 자살 기도 사실을 알게 된 김유정은 곧장 박록주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조선극장 지배인 신 씨가 와 있었고, 신 씨를 만나기 전의 남편이었던 남백우 씨도 와 있었습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박록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왜 왔냐고 물었고, 두 남자는 할 말이 없어서 머쓱했겠죠.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김유정이 끼어들었습니다.
 
장사지내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김유정의 농담에 박록주는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임에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퇴원을 한 박록주는 조선극장 지배인 신 씨와 살림을 차렸던 집에서 나와 수화동으로 이사를 했는데요, 김유정은 그런 박록주에게 찾아가서 자신과 결혼을 해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합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나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소. 단지 당신에게 마음 가지 않는 것도 내 잘못이오?
 
라고 하며 끝내 청혼을 거절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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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박록주는 순천 갑부 김종익을 만나 결혼하는데요,
김종익은 공평동 29번지에 성악연구회 사무실을 차려서 박록주의 활동을 지원합니다.
 
박록주는 동양극장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1주년 기념공연에서 창극 "춘향가" 전편을 공연했는데요, 그 공연이 폭발적 인기를 얻어 전국 순회공연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박록주의 선택을 받지 못한 김유정은 박록주가 김종익과 결혼하자 낙담해서 술만 마시며 폐인생활을 했고, 그러다가 몸이 크게 상하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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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낙비를 응모해 당선됐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를 응모해서 또 당선됐습니다. 이상, 정지용,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단편 봄봄, 동백꽃, 봄과 따라지, 만무방등의 토속성 짙은 작품들을 남기지만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되어 1937329일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당시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김유정의 친구 안회남의 증언에 의하면, 김유정은 죽을 때까지 박록주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내가 그이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했던 벌을 늦게 받아서 평생 가난하고 <기를 거(자식)> 없이 살았지 않았나 싶소.
 
박록주는 김유정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가슴아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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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는 그 후 성악연구회 창립2주년 기념공연에서 "심청가"의 심청 역을 맡아 공연하고, 1936년부터는 창극운동을 전개하여 성악연구회 직속 창극단 <창극좌>를 창단하고 "흥보전"을 시작으로 "숙영낭자전", "옹고집전", "별주부전(수궁가)", "배비장전" 등을 공연하여 창극계의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해방 후 박록주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하고 창극 "옥중화(獄中花)"를 공연했는데요, 이것이 여성국극(女性國劇)의 창시였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돼 열녀화로 군 위문공연을 다녔는데요, 이때 한쪽 눈을 실명했고, 때문에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습니다.
 
박록주는 196412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196910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은퇴공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8년 고향 선산에서,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마지막으로 "백발가"를 부르며 고별공연을 하고 52674세 일기로 면목동 단칸방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 소설가 전은강이었습니다.

 
참고: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박록주 저, 뿌리 깊은 나무, 1976, 6),
"봄봄이 사랑한 명창, 박록주"(하윤아, KBS전주방송 작가, 2011, 06),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활동(김석배, 판소리학회지, 2000,12.),
박록주 홍보가의 음악적 특징(채수정,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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