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은강입니다.
전우치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저도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존인물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 작자 미상의 소설 뎐우치젼(田禹治傳)이 있었습니다.
실존인물 전우치를 주인공으로,
홍길동전을 모방해서 지은 소설이었는데요,
홍길동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또한 의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우치전에서는 전우치가 여우의 구슬을 삼치고 도력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전우치 설화에서는 여우에게서 신서(神書)를 받고 도력을 얻었다고 되어 있더군요.
전우치전에서 전우치는 세금사라는 절에서 여우와 친합하는 야한 얘기도 포함돼 있습니다.
도술로 소란을 일으키고,
임금을 속이기도 하며, 도술로 어지럽게 꼬인 송사를 해결하기도 하는 등 민인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데요,
영화 전우치와 비슷하죠?
영화가 소설 전우치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헌에는 전우치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하여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간행한 대동기문(大東奇聞)을 보니,
<전우치가 밥을 뿜으니 모두 나비로 변하다>
라고 되어 있군요.
어우야담(於于野談)에도 같은 내용이 있고요.
이와 비슷한 내용은 남사고 설화에서도 나오는데요,
남사고가 보리밥을 뿜으니 모두 벌로 변해서 풍신수길의 얼굴을 쏘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동기문은 <전우치가 밥을 뿜으니 모두 나비로 변>한 일이
명종조 때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네요.
명종은 조선 제13대 왕으로, 1545년에서 1567까지 재위했는데요,
선대 왕은 인종이었고,
명종의 위는 선조가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전우치도 남사고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는,
전우치는 담양(潭陽) 인이다.
라고 기록돼 있는데요. 전우치 본관이 담양이라는 뜻입니다,
저의 조상님이네요.
전우치는 담양 인이다. 어린 시절에 절에서 글을 읽었는데 하루는 중이 술 한 항아리를 빚어 놓고는 그에게 잘 간수하라 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 중이 여러 날 만에 암자에 돌아와서 술항아리를 보니 술은 없고 술찌끼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중이 우치(禹治)에게 술을 훔쳐 마셨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우치는 결백을 밝힐 길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우치는 할 수 없이 중에게 부탁하기를,
“술을 다시 한 항아리 빚어 놓으면 내가 틀림없이 도둑을 잡겠습니다.”
하니, 중이 우치의 말대로 다시 술을 빚어 넣었다.
그런데 술이 막 익어갈 무렵에 우치가 지켜보니 흰 기운이 무지개와 같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술항아리 입에 박혀 있고,
술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이었다.
우치는 흰 기운이 일어난 곳을 찾아 따라가 보았는데,
그 기운이 앞산 바위 구멍으로 이어졌고,
그 바위 구멍 입구에는 커다란 흰 여우가 술에 취하여 졸고 있었다.
우치는 밧줄로 그 여우의 주둥이와 네 다리를 꽁꽁 묶어 짊어지고 돌아와서 암자의 대들보에 달아매 놓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글을 읽었다.
얼마 있자 여우가 술에서 깨어나 사람의 말로 슬피 하소연하기를,
“만약 나는 놓아준다면 마땅히 당신에게 큰 보답을 하겠소.”
하므로, 우치가,
“나에게 무슨 물건으로 보답하겠느냐? 그리고 네가 또 도망간다면 어떡한단 말이냐. 그러니 너를 죽여서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우가,
“나에게 요술하는 비결책이 있는데 그 책을 바위 구멍 속에 감추어 두었소.
그 책을 당신에게 줄 것이니 속는 셈치고 나를 밧줄로 매어서 그대로 놓아 바위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해보시오. 그랬다가 만약 나오지 않거든 그때 그 밧줄을 끌어내어 나를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요.”
했다. 우치는 여우 말대로 했는데
여우가 한 권의 신서(神書)를 가지고 나와서 바쳤다.
우치가 여우를 놓아주고 그 책을 펴 보니 모두 다 신령한 법술과 비전(祕傳)의 주문(呪文)이므로 부적을 쓸 때 사용하는 광물인 주사(硃砂)를 갈아 그 책 내용 중 쉽게 깨칠 만한 것 수십 가지에 점을 찍어 놓았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의 집 늙은 종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하며 와서 그의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전하는 것이었다. 우치가 보던 책을 버리고 창황(蒼黃)히 문 밖으로 나가니 늙은 종은 간 곳이 없었다.
우치는 그제서야 요망한 여우에게 홀림을 당한 것이라 깨닫고 그 길로 들어가 여우가 준 비결책을 챙겨보니, 주사로 점찍어 놓은 것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여우가 다 도려가고 없었다.
우치는 그 후에 환술(幻術)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 주사로 점찍었던 수십 가지 속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청장관전서에 기록된 내용인데요,
전우치가 환술을 터득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네요.
1666년(현종 7년)에 홍만종(洪萬宗)이 역대 기인의 행적을 모아 엮은 해동이적(海東異蹟)이라는 책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요,
경인문화사에서 펴낸 홍만종 저, 황윤석 증보, 신해진, 김석태 역주의 증보 해동이적에는,
전우치는 젊었을 때 천 년 묵은 여우의 무덤 속에서 책을 얻어 그것으로 환술을 익히고 한양의 재상 집 부녀자들과 두루 음분을 저질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야사와 소화, 만록 등을 모아 엮은 대동야승(大東野乘) 중
이기(李墍)가 지은 「송와잡설(松窩雜說)」을 보니,
전우치(田禹治)는 해서(海西: 해서는 황해도를 말하는데요,)
해서 사람이다.
배우지 않고서도 글에 능하며,
시어(詩語)가 시원스러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도술(道術)이 있어서 귀신을 부린다고 말하였다.
현감 이길(李佶)은 전우치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길의 논밭이 부평(富平)에 있었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역질(疫疾)이 크게 성하여, 이길의 종과 이웃집 열 명 가량이 몹시 심하게 앓아누웠다. 이길이 전우치에게 병을 물리쳐 주기를 청하니, 전우치는 허락하면서,
“그 지역에 앉을 만한 높은 언덕이 있소?”
하고 물었다.
“숲에 앉을 만한 정자가 있소”
하니, 전우치는
“아무 날에 갈 터이니, 미리 정자에 좌석을 마련하고 기다리시오.”
하였다. 그날이 되어 전우치가 숲 밑에 앉아서 두어 마디 소리로 뭔가를 부르는 것같은 소리를 내자, 이웃의 앓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일어나 앉으며 일시에 ‘나았다.’ 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병이 나아서, 다시 전염되는 걱정이 없었다.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가정은 명나라 세종, 즉 명세종의 연호인데요, 조선 중종 17년인 1522년부터 명종 22년이고 선조 즉위원년인 1567년까지 재위했으니, 대동기문의 기록과 비슷하네요.
구한말 학자 조긍섭(曺兢燮)이 지은 암서집(巖西集)에는 조긍섭이 김택영(金澤榮)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김창강에 대한 만사」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요,
맨 끝에
동쪽으로 바라본 고국 티끌에 흐리나(故園東望莽塵埃)
혼기야 어찌 오고감이 막혔으랴(魂氣何曾阻往來)
전선과 함께 난새와 학을 타고(應與田仙駕鸞鶴)
밝은 달밤 서른여섯 봉우리를 돌겠지(月明三十六峰回)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난새는 전설의 새인데요, 봉황과 비슷한 새입니다.
그런데 전선(田仙)의 주석에,
<전선(田仙)은 조선조 중종, 명종 연간에 송도(松都)에서 살았던 전우치(田禹治)를 말하는데, 신선술ㆍ의술ㆍ점술ㆍ관상술 등에 정통하여 많은 전설을 남긴 인물이다.>
라고 되어 있네요.
허균(許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전우치에 대한 간단한 기록과 함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우사(羽士: 도교의 도사) 전우치(田禹治)는 사람들의 말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하며,
그의 시는 매우 청월(淸越: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다)하다. 일찍이 삼일포(三日浦)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靑鸞不至海天闊)
서른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三十六峯秋月明)
라 하였으니,
이를 읽노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참고: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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