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강이 만난 역사인물
고려삼은(高麗三隱) 중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안녕하세요, 전은강입니다.
정몽주가 활동한 고려 말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큰 격변기였는데요,
1세기 가깝게 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했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일어나면서 주변국 정세가 요동치는 때에 고려는 원나라의 심한 내정간섭으로 양위와 복위가 수시로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원나라와 신흥 강대국 명나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신료들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갈라져 대결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부패하면서 도학, 즉 리학이 일어나 번성하면서 유불 교체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지방향리 중심의 중소지주 출신 신흥사대부가 부상하면서 배불정책을 주장하였으므로 이 또한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고려는 이때 원나라에 유학한 이색(李穡)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서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유생들에게 정주(정이와 주희)의 학설을 가르쳤는데요,
대사성 이색은 정몽주와 김구용,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등을 경사(經師)로 발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학관이면서 동시에 이색의 제자들이었죠.
정몽주는 이때 이색의 학문을 뛰어넘는 학자로 성장했고, 그래서 이색은 정뭉주를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 즉 시조로 삼는다고 선언합니다.
이색의 도학은 정몽주가 계승하고, 정몽주의 학문은 길재에게로 이어지죠. 그리고 길재의 학문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가, 김숙자의 학문은 김종직이, 김종직의 학문은 김굉필이, 김굉필의 학문은 조광조가 계승하는 도통(道統)을 형성하게 되는데요, 후일 이 도학은 리학(理學)으로 불리게 됩니다.
리학(理學)은 성리지학(性理之學)과 의리지학(義理之學)을 합쳐서 부르는 말인데요,
성리지학은 본체, 즉 본성에 대한 이론 위주라면 의리지학은 형이상학적 실천윤리 위주의 학문입니다.
정몽주는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년) 12월, 영천 우항리에서 내어났습니다. 초명은 몽란(夢蘭)이고, 아홉 살 때 몽룡(夢龍)으로 고쳤으며, 관례(冠礼)를 치른 후 몽주(夢周)로 하였습니다. 관례라고 하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쪽을 찌는 일종의 성년식입니다. 보통 택일을 한 후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행했죠.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인데요, 아버지는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추증된 정운관(鄭云瓘)이고, 어머니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으로 추증된 영천이씨(永川李氏)입니다.
아버지는 복응재생(服膺齋生) 벼슬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복응재생은 성균관에서 예기(禮記)를 강의하던 직책이었습니다.
정몽주도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고 대사성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익혔는데요,
아버지로부터 기본적 학문을 익힌 후 이색의 지도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고려사에는 정몽주가 1360년(공민왕 9년) 음력 10월 1일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초장(初場)과 중장(中場), 종장(終場)으로 나누어진 3단계 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여 장원급제를 했던 겁니다.
그 이듬해인 1361년 홍건적이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는데요, 공민왕은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세워서 막으러 보내지만 대패하는 바람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開京), 지금의 개성까지 함락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급히 몽진을 하게 되는데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한 후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에, 안우를 도원수(都元帥)에, 그리고 김득배를 원수(元帥)에 세워서 반격을 명합니다.
김득배와 최영(崔瑩),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등의 장수들은 20만 군사로 개경 교외 천수사(天壽寺) 앞에 진을 친 후 개경에 들어온 홍건적을 쳤습니다. 그러자 열세를 느낀 홍건적은 개경을 빠져나가 압록강 쪽으로 달아났고, 고려군은 쫓아가며 쳐서 홍건적 10만의 목을 베고 압록강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이라는 자가 정세운과 안우, 김득배와 이방실이 큰 공을 세우자 그들을 모두 살해하기로 흉계를 꾸미고는,
가짜 조서로 왕명이라 속이고 김득배 등에게 정세운을 살해하게 했습니다.
김득배는 조서가 가짜인 것을 모르고 어명에 따라 정세운을 죽이게 되는데요,
김용은 공민왕에게는 김득배와 안우, 이방실이 멋대로 정세운을 죽였다고 거짓을 고했습니다.
김용에게 속은 공민왕은 대로했고, 안우와 이방실을 참했습니다. 그제야 김용에게 속은 것을 안 김득배는 일단 결백을 증명할 시간을 벌기 위해 상양현(上陽縣)으로 몸을 피했지만 상주(尙州)에서 잡혀 효수됐는데요,
그런데 이 김득배는 무장이기도 했지만 학자이기도 해서,
정몽주가 과거를 볼 때 지공거(知貢擧), 즉 과거시험 주 고시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몽주는 김득배로부터 학문도 전수를 받아서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는데요,
김득배가 왕을 능멸하고 효수되었으므로 모두들 몸을 사리며 거들떠보지 않을 때
정몽주 혼자서 공민왕께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많은 불이익이 예상됐을 것임에도 그것을 감내한 것이죠.
공민왕은 김득배에게 분노해 있긴 했지만 그가 생전 충성스런 신하였으므로
정몽주의 청을 윤허합니다.
그래서 정몽주는 예법에 따라 스승 김득배의 장례를 치릅니다.
김득배의 억울한 누명은 1392년(공양왕 4년)에야 벗겨지고,
김득배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집니다.
정몽주는 1367년(공민왕 16년)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는데요,
이때의 성균관 대사성은 바로 이색이었습니다.
이색이 정몽주를 성균박사로 발탁하고 경사로 삼아서 학도들에게 정주(정이와 주희)의 학설을 가르치게 했던 것인데요,
정몽주가 그 전에 이미 이색으로부터 정주학, 다시 말해 성리학을 공부했기에 당시에는 신학문이었던 성리학을 학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당시는 학자들이 성리학이 아닌 유학, 다시 말해 원초유학을 공부하던 때였고,
이색이 원나라에 유학을 가서 성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돌아와 이를 신흥사대부들에게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때의 정몽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다. 당시 경서가 우리나라로 온 것은 오로지 『주자집주(朱子集註)』 뿐이었다. 정몽주의 강설(講說)이 매끄럽고 두드러졌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스러워하였다. 뒤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은 후에야 꼭 맞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여러 유학자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참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몽주는 그리고 1373년(공민왕 22년)엔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사신행차에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요,
그러나 고려는 이때까지도 원나라 지배를 받고 있었죠.
홍건적 장수 출신 주원장이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건국한 후 혼란에 빠진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내며 고려에는 친명배원을 요구하고 있을 때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신행차는 정사, 부사(副使)와 함께 외교문서 담당관인 서장관, 이렇게 3사(使)가 주축을 이루죠.
서장관으로 사행(使行)을 다녀온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이후 요직에 오르게 되는데요, 서장관은 사신이 가는 나라 신하들과 문장, 혹은 학문을 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중국 같은 경우에는 우리 사신이 가면 매우 얕보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문장이 뛰어난 사람, 중국 신하들에게 밀리지 않는 학식을 갖춘 사람을 서장관에 발탁했던 것이죠.
그런데 돌아오던 사신행차가 허산(許山)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버립니다. 그 사고로 홍사범이 익사를 했는데요,
다행히 정몽주는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지만 명나라 중서성에서 발행한 자문(咨文), 자문은 외교공문이죠, 그 자문을 잃어버립니다.
정몽주는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서 중서성에 그 사실을 말하는데요, 명나라 중서성에서도 2통의 자문 중 1통의 자문만 초본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 1통만 초사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정몽주가 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그 이듬해인 1374년에 공민왕이 자제위(子弟衛)의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열 살 나이의 어린 우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요,
왕권이 약했던 우왕은 무신 최영을 높이 등용하고 가까이 두어 그 보호를 받고자합니다.
그런데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고려 땅 철령(鐵嶺: 지금의 강원도 안변과 회양을 잇는 고개)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선왕이었던 공민왕은 요동 땅 동녕부를 두 차례 공격하며 북진책을 펼쳤는데요,
그러자 명나라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하며 고려를 견제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네가 요동에서 고려를 밀어내고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철령 이북지역을 명나라 땅으로 삼겠다고 통보한 겁니다.
우왕은 명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반발했고,
최영장군을 팔도도통사에 세우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세워 요동정벌을 명하죠.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그래서 요동으로 향하던 조민수와 이성계가 5월 22일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했고,
그 군사로 반란을 일으켜서 우왕은 강화도로, 최영은 고봉으로 각각 유배시키죠.
이렇게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을 폐하고 아홉 살의 어린 창왕을 새 왕에 옹립합니다.
고려말 개혁을 주도하던 신흥사대부세력은 이때부터 고려를 개혁해서 이어가려는 이색, 이숭인 중심의 절의파(節義派)와,
이참에 고려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며 반역무신과 손잡은 정도전 중심의 강성개혁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로 갈라집니다.
이성계는 이듬해에 강화도로 유배시킨 우왕을 여흥군(지금의 여주)으로 옮기고 최영 장군을 처형하는데요,
절의파의 우두머리인 이색이 명나라에 진상을 알리고 우왕을 복위시키려 하자 이색 또한 장단에 유배시킵니다.
그리고 또 우왕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강릉으로 이배한 후 우왕과 공모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창왕 또한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시켜버리죠.
그리고는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왕을 폐하고 진왕을 세운다)을 명분으로 공양왕을 새 왕으로 옹립합니다.
가왕을 폐하고 진왕을 세운다는 것은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었으므로 그 자식인 창왕도 왕씨 혈통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그 얘기는 이색 편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정몽주는 이때까지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389년(공양왕 1년)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는데요, 그 공으로 이듬 해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집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으로 보내 우왕을 살해하고, 예문관대제학 유구를 강화도로 보내 창왕마저 죽이자 이성계의 국가찬탈 의지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이색, 권근, 이숭인, 김사안, 이종학, 이림, 변안열, 권중화, 김종연 등의 절의파 쪽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는 이성계가 황해도 해주에서 사냥하던 중 낙마로 부상을 입어 꼼짝할 수 없게 된 틈을 타서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 역성혁명파 제거에 나섭니다.
그래서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 역성혁명파 핵심들을 탄핵하여 이미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감금하고, 조준과 남은을 귀양 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방원이 절의파의 대반격을 간파하고 황해도로 달려가서 이성계를 모셔오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역성혁명파의 대응을 엿보러 갔던 정몽주는 이방원과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를 주고받게 되죠.
고려사 「世家」에는 1392년(공양왕 4년)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였다.>
라고 기록돼 있더군요.
그리고 고려사」 「열전」에는 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정몽주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먹지도 못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 태종은 또 아뢰어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하여야 합니까?”
라고 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생사는 운명에 달렸으니, 다만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태조의 아우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 등과 함께 휘하의 무사들과 논의하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에 충성을 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입니다.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오명(惡名)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능히 판가름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누설하였으므로,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변화가 있는지를 살펴보려 하였지만 태조는 그를 대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 정몽주가 돌아갈 때에 조영규(趙英珪) 등 네댓 명을 보내 길에서 격살(擊殺)하게 하니,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들어가 고하자, 태조가 진노하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더니 태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대신을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가문은 평소 충효(忠孝)로 소문났는데, 너희들이 감히 불효(不孝)를 저질러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하였다. 태종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효(孝)이니, 마땅히 휘하 군사를 불러 모아 뜻밖의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는 부득이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왕에게 말하기를,
“정몽주 등의 당(黨)이 죄인을 비호하면서 몰래 대간을 꾀어내어 충량(忠良)한 신하들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조준,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변명하게 하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 보냈고, 더불어 그 당도 유배 보냈으며, 정몽주의 머리를 저자에 매달고, 방(榜)을 내걸어 알리기를, “거짓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하였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또 상소하여 그 집을 적몰하였다.>
(참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기서 말하는 태조는 이성계이고, 태종은 이방원이니,
이 열전이 후대 조선시대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용비어천가」에서도 정몽주 참살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방원이 이성계 허락 없이 조영규와 조영무, 고여, 이부 등의 수하를 부려 정몽주를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리 대기하던 조영규가 칼로 쳤으나 정몽주가 맞지 않았고, 추격해서 말을 쳐서 낙마시킨 후 고여 등이 목을 베었다고 하는데요,
응교(應敎)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해동악부(海東府)에 <단심가>가 실려 있습니다.
<문충공(정몽주의 시호)의 마음과 형적이 더욱 드러나자
(역성혁명에 협조할 뜻 없고 고려를 지키려는 의지가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는 뜻이겠죠?
그러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그를 초청하고,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며,
此亦何如 彼亦何如(차역하여 피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後垣 頹落亦何如(성황후원 퇴락역하여)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라고 읊으니,
문충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경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녕유개리야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응수하였다. 태종이 문충공의 뜻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제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문충공 중몽주가 하루는 태조(이성계)의 집에 병문안을 가서 그 기색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옛날의 술친구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외출하고 뜰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마시고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오늘은 날씨가 몹시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몇 대접의 술을 마시고 나왔다.
그 집 사람이 이상히 여겼더니, 얼마 안 되어 정 시중(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이 들렸다.
문충공이 태종의 집에서 돌아올 적에 그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활을 멘 무인이 있었다. 문충공이 따라오는 녹사(錄事: 보좌관)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뒤에 떨어져라.”
라고 했는데,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라고 했다. 문충공이 재삼 꾸짖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문충공이 살해를 당할 적에 서로 끌어안고 함께 죽었는데, 그 당시 창졸간에 그의 성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마침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
(참고: 한국고전종합DB)
해동악부의 기록인데요,
정몽주는 이방원의 집을 나서며 선죽교에서 타살당할 것을 미리 알고서
말에 거꾸로 앉아서 갔다는 설화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거사 후 이성계는 함부로 대신을 죽였다고
이방원을 호되게 혼냈다지만
그건 만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던 정몽주를 살해한 것에 대한 비난을 의식하고서 벌인 연극이었을 것이고,
속으로는 비협조적인 절의파에 대해
“계속 반발하면 너희들도 곧 그렇게 된다.”
라는 본보기를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좋아했을 겁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초기에는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방원이 즉위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이 ‘고금의 의리’를 들어 정몽주의 절의를 평가하고 추증해야 한다고 건의하는데요,
이방원은 자신이 한 짓임에도 뻔뻔하게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정몽주를 영의정 부사(領議政 府事)에 추증합니다. 조선의 폭압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치였겠죠.
그리고 1431년, 세종 13년 11월 11일,
세종임금이,
"문화시중 정몽주(鄭夢周)는 죽기까지 절개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며, 주서 길재(吉再)는 절개를 지켜 마음을 변하지 않고 상소해서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찬술(撰述)한 《충신도(忠臣圖)》안에 모두 얼굴을 그리고 칭송의 글을 짓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리면서 정몽주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세조 2년인 1456년 3월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510년, 중종 5년 경연청 검토관(檢討官) 이자(李耔)가 정몽주와 길재의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하며 문묘종사를 주장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정몽주의 문묘종사 주장이 이어졌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1517년, 중종 12년 8월 성균 생원(成均生員) 권전(權磌) 등이 정몽주와 김굉필(金宏弼)의 문묘종사를 상소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훈구세력의 방해로 김굉필은 문묘종사하지 못하고 정몽주만 문묘종사가 이루어져서 묘를 수리하고 사당에 배향하게 됐습니다.
이상 소설가 전은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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