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李穡)
안녕하세요, 전은강입니다.
이색은 1328년, 고려 충숙왕 15년에 영해부 호지촌(豪池村: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의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괴시리로 가보겠습니다.
여기가 괴시리입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목은기념관>이고요,
생가지입니다.
이색 동상도 있고요,
생가지 앞입니다.
복원해놓은 생가와 그 옆의 기념관이고요
(시비도 있습니다.)
이색의 자는 영숙(穎叔)이고, 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입니다.
고려는 이때 큰 격변기였는데요, 원나라가 정쟁과 반란으로 쇠퇴하자 홍건적 장수 출신인 한족 주원장이 장강 유역에서 일어나
1367년(공민왕 16년) 명나라를 건국하고 원나라와 대결하게 됩니다.
그러자 고려는 쇠퇴하고 있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배원정책(排元政策)을 펼치며 원나라가 세운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합니다.
고려는 당시 지방향리 중심의 중소지주(中小地主) 출신 신흥사대부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귀족불교가 심각하게 부패하면서 성리학, 즉 주자학이 불교를 대신할 정치이념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요,
1289년(충렬왕 15년)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와서 고려에 소개하면서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번져갔고,
그 뒤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왔고, 백이정 문하에서 이제현과 박충좌가 수학하고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바로 그 이제현 문하에서 이색이 수학했는데요,
이색은 아버지 이곡(李穀)이 원나라 벼슬을 하느라 연경에 가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개경으로 올라가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이제현 문하에 있던 송성총이라는 사람이
겨우 14세이던 이색에게 성균시를 보라고 권합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합격할 것이라는 얘기였지요.
송성총이 종이까지 사주며 한사코 권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성균시를 보게 됐는데,
뜻밖에도 합격했고,
그래서 이색은 14세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됩니다.
1346년(충목왕 2년)에는 아버지가 있는 원나라 연경으로 유학을 가고,
2년 후에는 원나라 생원시에 합격해서 원나라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익힙니다.
이색이 원나라에 유학 중일 때 원나라 유양 사람 구양현이 이색의 학문이 깊다는 얘기를 듣고 그 실력을 떠보려고,
“짐승 발자국과 새발자국이 길을 만들어 온 나라에 어지럽다(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라고 말했는데요, 온갖 잡것들이 다 몰려들어서 연경이 요(堯)임금이 서기 전의 어지러운 세상으로 돌아간 듯하다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색은,
“개 짖고 닭 우는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라고 응수했습니다. 짐승이 몰려들어 난장판이 되자 사방에서 개가 짖고 닭이 울어 더한 난장판이 됐다는 말로,
구양현의 말이 개소리라는 뜻이었지요.
이색에게 한 방 크게 먹은 구양현은,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 보고서야 바다가 큰 줄 알겠는가(持盃入海 知多海).”
하고 재차 공격했는데요, 굳이 잔을 들고 큰 바다에 들어가 봐야 자신이 가진 그릇이 작다는 것을 알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수준 낮은 고려의 학문이면 고려의 작은 땅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굳이 큰 바다 연경으로 유학 올 필요까지 있었겠느냐, 뭐 그런 비아냥거림이었겠지요.
그러자 이색은,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는 하늘 작다 말하네(坐井觀天 曰小天).”
라고 또 받아쳤습니다. 너의 좁은 견문부터 넓힌 후 남의 허물을 지적하라는 뜻이었지요.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입니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년) 고려의 거자과에 합격하고 예문관검열을 역임했으며, 1332년(충숙왕 복위 1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제과에 아원으로 급제했습니다.
원나라 정동행중서성의 좌우사원외랑에 임명된 후 6년간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본국 고려로 돌아와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정당문학,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집니다.
그러나 1349년 충목왕이 붕어했을 때 공민왕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했고, 정치보복을 피해 관동지방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다가 충정왕 3년이자 공민왕 원년인 1351년에 은신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원나라 국자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이색은 고려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는데요,
삼년상을 마친 후인 1353년(공민왕 2년)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하고 숙옹부승에 임명됩니다. 고려의 숙옹부승 벼슬을 하며 원나라 정동행성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고, 천추사의 서장관에 발탁돼 연경에 갔습니다.
이색은 연경에 머물며 원나라 정시에 급제해 응봉 한림문자동 지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에 임명되지만
원나라 벼슬을 하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서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지제교 겸 예문응교에 임명됩니다.
1355년 원나라 조정에서 이색을 소환는데요,
이색은 원나라의 명을 거부할 수 없어 연경으로 가서 원나라 벼슬을 살지만 1년 후 사직하고 귀국했습니다.
이때는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옹립하려다가 실패한 공민왕이 즉위해 있었는데요,
공민왕은 이색을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지제교 겸 병부낭중에 임명합니다.
이색은 공민왕의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죽기 전까지 공민왕을 도와 고려 개혁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이룹니다.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성균관을 재건하였으며,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부패척결을 위해 염철별감(소금전매청)을 폐지했고,
또 친원권문세가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원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배원자주정책(排元自主政策)을 추진했습니다.
장차 중원세력이 일어나 서북변 밖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북진책으로 원나라에 빼앗긴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간해서 공민왕과 함께 북진책을 썼습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해 왔는데요, 이때 이색은 왕을 복주(지금의 안동)까지 호종하고 그 공으로 신축호종공신 1등에 책록됐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신돈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타락하는데요,
공민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폭군으로 변하자 이색은 줄기차게 임금으로서의 모범을 청합니다.
그러자 공민왕은 이색을 하옥시켜버립니다.
이색은 실망해서 공민왕에게서 멀어졌고, 성균관에서 학도들에게 성리학을 강학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1367년(공민왕 16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며 직접 학도들과 마주하고 정주(정이와 주희)의 학설을 강론하며 성리학 전파에 매진했는데요,
이때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등을 발탁하여 학관으로 삼았습니다.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익힌 학자들이었는데요, 이들이 후에 절의파의 핵심이 됩니다.
그 후 공민왕은 신돈을 내쫓고 다시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는데요,
이색도 성균관에서 예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공민왕의 국정을 돕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공민왕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고,
결국 공민왕은 1374년 자제위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 의해 시해되고 맙니다.
그래서 10세의 강녕부원대군 왕우가 고려 제32대 왕에 즉위하는데요,
그러나 우왕은 최영 등의 무신들을 가까이하며 신흥사대부를 멀리하게 되죠.
무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이색은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원나라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심왕 왕호의 손자 톡토부카(脫脫不花)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러자 우왕은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해 원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원나라를 잘 아는 이색을 정당문학에 제수하고 소환해서 원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색은 원나라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 교섭에 나섰고, 고려왕을 교체하려는 원나라의 계획을 철회하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 이색은 우왕을 잘 보필해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1389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의 시대도 끝나고 말죠.
공민왕 시절 이색은 명나라의 동북진출을 막기 위해 북진책을 건의했고,
이색을 총애한 공민왕은 그 뜻에 따라 두 차례 동녕부를 공격하여
압록강과 파저강 건너의 우라산성을 빼앗아 교두보를 확보한 후
요동 땅 여러 성을 빼앗아 고려 땅으로 삼았는데요,
홍건적의 난이 있은 후 원나라가 그 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틈을 파고 든 것입니다.
그러자 명나라는 1371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하고 고려의 요동 진출에 맞섰습니다.
이색은 우왕 때에도 고려의 북진책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강해진 명나라가 요동 땅에서 고려를 밀어내려고
고려 땅인 철령, (철령은 지금의 강원도 안변과 회양을 잇는 고개인데요)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철령 이북을 명나라가 가질 테니 고려는 요동에서 철수하라는 요구였던 겁니다.
이색은 최영과 함께,
요동을 명나라에 내줄 수 없으니 이참에 요양에서 명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고려가 요양까지 진출해야 한다며 요동정벌을 주장합니다. 바로 주전론(主戰論)인데요,
이를 받아들은 우왕은 봉산, 즉 황해도 봉산군으로 친히 가서 최영과 조민수, 이성계에게
출병을 명합니다.
그러나 조민수와 이성계는 명나라와 싸워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 핑계는 이렇습니다.
“첫째, 이소역대(以小逆大)라서 안 되고,
즉,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이라서 안 되고,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은 병법에 맞지 않으며,
즉,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병법에 맞지 않으며,
셋째, 거국원정(擧國遠征)하면 왜승기허(倭乘其虛)일 것이며,
즉, 거국적 원정을 나가면 왜구가 허점을 노리고 기승을 부릴 것이며,
넷째, 시방서우(時方暑雨)라 궁노교해(弓弩膠解)이고 대군질역(大軍疾疫)이기 때문에,
즉, 지금은 장마철이라 활과 쇠뇌의 아교를 칠한 접착부위가 풀어져 쓸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대군의 전염병 우려도 있기 때문에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렇게 반대하자 우왕은 핑계가 지나치다며 크게 역정을 냅니다.
그리고는 최영을 팔도도통사에 세우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세워 요동정벌을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최영이 팔도도통사로서 요동정벌의 총책임자이긴 하지만 직접 출전하지는 않고 평양에서 지휘하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좌우군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동으로 향하던 조민수와 이성계는 5월 22일 서로 짜고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을 하죠.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인데요,
조민수와 이성계는 이때 이미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충성하여
고려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치밀하게 꾸미고서 그 계획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왕이 명나라와 싸우려 했으므로 자신들이 군사를 돌리면 명나라가 우왕을 미워하고 자신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며,
명나라가 자신들을 돕는다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이었겠지요.
조민수와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개경을 공격합니다.
그러자 우왕과 최영은 각 도의 남아 있던 군사를 급히 불러 모아서 막아봅니다만
정규군의 반란을 막긴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친위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반란군에 제압되고,
개경이 조민수와 이성계의 반란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우왕은 붙잡혀 강화(江華)에 유배되고
최영도 잡혀서 고봉(高峰)에 유배되고 맙니다.
이때부터 고려의 신흥사대부 정치세력은 고려를 개혁하여 성리학적 이념으로 재무장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이색, 이숭인 중심의 온건파와,
이참에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도전, 변계량, 남은 중심의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로 갈라지게 되는데요,
역성혁명파는 당연히 조민수와 이성계를 지지했겠죠?
정권을 잡은 조민수와 이성계는 그런데 반역에 성공하고도 자기들이 직접
다음 왕을 옹립하지 않고 이색과 이숭인 등의 절의파로 하여금 우왕의 아들 왕창을 새 왕에 옹립하도록 유도합니다. 바로 창왕인데요, 이때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절의파의 지원으로 창왕이 즉위하자
조민수와 이성계를 따르는 역성혁명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인 것을 알면서도 이색과 이숭인 등이 우왕을 섬겼으며,
우왕의 자식인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아까 원나라가 우왕은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고 의심했다고 했는데요,
우왕은 궁인 한씨, 즉 순정왕후(順靜王后)의 소생입니다.
그런데 우왕 2년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가 자신이 우왕의 생모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인데요,
반야의 주장이 일반 백성에게 그럴듯하게 들린 이유는,
우왕이 궁에서 나고 궁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어려서 신돈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친자확인을 통해 진실을 밝힐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진실은 알 길이 없었죠.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 즉 역성혁명파가 그 약점을 파고 든 것이죠.
이색은 역성혁명파의 계략을 눈치 채고 즉각 우왕 복위운동으로 맞섭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있는 제자인 이숭인과 김사안을 대동하고
서둘러 명나라로 달려갔습니다.
명분은 주청사였지만 실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우왕 복위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러 간 것이었는데요,
그것을 눈치 챈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 이방원을 서장관으로 따라가서 이색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또, 명나라가 이색의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에 대비해 1389년 9월 우왕을 여흥군(지금의 여주)로 옮겨서 숨겨버립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이색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이색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색이 중원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색이 주청사로 명나라에 오자 주원장은 크게 환대했는데요,
이색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우왕 복위를 도와줄 것과
황자 중 한 명을 고려에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명나라 황자가 고려에 와 있으면 이성계 일파가 국가 찬탈 음모를 진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이색의 그 요청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들들, 즉 명나라 황자들이 반대를 하고 나서는데요,
서장관으로 함께 따라간 이방원이 황자들을 구워삶았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황자들은 조민수와 이성계가 명나라에 충성하는 장수들이며,
명나라와 싸우라는 고려 우왕의 명을 거역하였다가 반역자로 몰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왕을 끌어내렸다는 이방원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며
누가 명나라에 이익이 되는 사람인지를 아버지 주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이성계 또한 이방원만 명나라로 보내서는 안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왕방과 조반을 명나라로 급파하여 명나라 신료들을 설득했는데요,
우왕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려던 고려왕이었으며,
우왕이 복위되면 명나라에 충성하는 고려 신하 조민수와 이성계는 반역죄로 처형될 것이지만
명나라가 조민수와 이성계를 도와준다면 그들이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더욱 충성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결국 황자들과 신료들의 설득으로 이색을 돕지 않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돕기로 결정합니다. 이성계 일파의 외교전 승리였습니다.
이색은 명나라 설득에 실패하고 크게 실망해서 귀국했고,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마음을 얻은 이성계는
돌아오던 이색을 장단에 잡아두고 감금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최영을 처형해버리고,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우왕도 강릉부로 이배했으며,
우왕과 공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창왕마저 폐위하고 강화로 유배시킵니다.
그런 다음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인 신 씨이며,
왕 씨가 아니므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왕을 폐하고 진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양왕을 새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리고는 서균형을 강릉으로 보내 우왕을 죽이고,
유구를 강화로 보내 창왕마저 죽입니다.
절의파의 우왕 복위운동이 오히려 역성혁명파를 더욱 자극하여 화를 키운 꼴이 되고 말았죠.
그런데 이때 <윤이와 이초의 옥>이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신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로 가서 명나라 재상을 만나고
우왕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면서 발생한 옥사였는데요,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한 것은 고려를 훔치려는 목적이여,
이성계가 고려를 훔치고 난 후엔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는데요,
그런데 그들이 별 이유도 없이 고려의 절의파인
이색, 권근, 이숭인, 김사안, 이색의 둘째아들 이종학,
그리고 이림, 변안열, 권중화, 김종연 등의 재상들이 이성계에 반대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거나 유배될 처지이니 그들을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이와 이초를 잡아들인 것은 이성계 일파였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이색이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서 실패하고 왔음에도 이들이 다시 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와 함께 반역을 일으킨 조민수가
<윤이와 이초>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윤이와 이초 사건을 조사한 것은 바로 조민수였습니다.
그런데 조민수는 윤이와 이초를 조사한 후 개인적 책동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종결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 쪽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고,
윤이와 이초를 명나라에 보낸 사람이 조민수였던 건 아닌가,
그렇기에 윤이와 이초를 감싸는 것 아닌가, 라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이성계 일파가 꾸민 치밀한 음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이와 이초를 이용해서 위화도회군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조민수를 제거했다는 얘기입니다.
절의파와 아무 관련도 없는 무신인 윤이와 이초가,
대단한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명나라에 가서 이색과 똑 같은 요청을 하고 왔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만약 조민수가 이성계를 치려했다면 낮은 직급의 무신을 명나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절반의 군권을 갖고 있는 자신이 그 군사의 힘으로 절의파를 도우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윤이와 이초의 옥>은
이성계 일파가 조민수를 제거하려고 조작한 사건이 아닌가 의심하는 겁니다.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를 윤이와 이초의 배후라고 결론 내리고 창녕으로 유배했습니다.
그리고는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에 가서 구명을 요청했다는 권근, 이숭인, 김사안, 이종학, 이림, 변안열, 권중화, 김종연 등도 모두 유배하는데요,
이들은 모두 절의파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이색 또한 장단에 감금되었다가 함창, 지금의 경북 상주시 함창읍으로 이배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이성계는 강력한 경쟁자인 조민수를 제거했고, 절의파로 불리는 정적까지 제거해서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제 공양왕을 폐하고 국가를 찬탈하기만 하면 되겠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성계는 이 호조건에서도 바로 나라를 훔치지 않고 1391년(공양왕 3년)에 느닷없이 이색을 풀어주며 한산부원군(韓山夫院君)에 봉합니다. 그리고는 이숭인과 김사안, 이종학 등의 절의파 대부분도 풀어줍니다.
이성계 일파가 그 어렵게 제거했던 정적들을 풀어주며 달래기에 나섰던 것인데요,
갑자기 회유책으로 돌아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 반역을 통한 국가 찬탈이 아닌
정의로운 혁명이어야만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고,
그래야 새로 건설할 국가에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계의 반역을 도운 핵심인물 정도전과 남은 등은 이색 제자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성리학을 익힌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성계를 돕는 이유는,
새로 건설할 국가 경영에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적용하면 완전한 도덕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데요,
그런데 그 첫 단계부터 반역을 통한 국가찬탈이 되면 그들이 아무리 성리학적 이념을 부르짖어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겠죠?
이성계를 돕고 있던 역성혁명파는 반역이 아닌 혁명을 위해 이색과 이색을 따르는 절의파 재상들을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힘없는 왕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나라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썩을 대로 썩은 고려는 이제 그만 문을 닫고 새로운 임금을 세워서 희망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백성들을 설득하려는 작업이었지요.
반역을 혁명으로 바꾸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색과 절의파가 나서서 고려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서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위민정치를 실현하자고 백성들을 설득해준다면 간단한 일이었죠.
그래서 이성계는 절의파를 풀어주며 달래기에 나섰고,
정도전과 남은 등의 역성혁명파는 절의파 설득에 나섰죠.
그렇지만 이색은 역성혁명파의 반역을 꾸짖으며 오히려 반격에 나섰는데요,
이 즈음 중립을 지키던 정몽주도 역성혁명파의 노골화된 국가찬탈 음모를 확인하고
절의파 쪽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이색은 정몽주와 이숭인, 권근 등의 절의파를 내세워 정도전을 탄핵해버립니다.
그러던 중 명나라에 간 세자를 마중 갔던 이성계가 황해도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꼼짝할 수 없게 되는데요, 이색과 절의파가 그 호기를 놓칠 리 없겠죠.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고 그 기회에 역성혁명파 척결에 나서는데요,
이색은 절의파 언관들을 내세워서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을 탄핵합니다. 그래서 이미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감금하고,
조준과 남은은 유배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해주로 달려가서 이성계를 가마로 모시고 돌아옵니다.
이성계가 개경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병문안을 핑계로 역성혁명파의 대응을 살피러 이성계를 찾아가는데요,
이방원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죽기 싫으면 우리를 도우라고 정몽주에게 시로 협박합니다.
그 시가 바로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의 「하여가(何如歌)」이죠.
그러자 정몽주는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곳쳐죽어/ 백골이 진토(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의 「단심가(丹心歌)」로 절의의 뜻을 밝힙니다.
그러자 포학한 성격의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했죠.
이성계는 혁명을 위해 그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데
그 아들이 정몽주를 죽여 버림으로써 반역을 더욱 노골화한 셈이 되고 말았는데요,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혁명을 포기하고 반역을 통한 국가 찬탈을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색을 다시 탄핵하는데요, 우왕이 신돈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충성했다는 이유로 금주(지금의 서울 금천구)로 추방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장흥으로 이배시킵니다.
이성계 일파는 나머지 절의파도 다시 유배시키는데요,
이숭인도 탄핵을 받고 호남 순천에,
이색의 아들 이종학도 곤장 1백대를 맞고 영남 함창(지금의 상주시 함창읍)에 유배됐습니다.
이성계는 결국 공양왕을 폐위했고,
역성혁명파인 배극렴, 정도전, 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됩니다.
조선 건국에 성공한 이성계는 1392년에 개국공신 황거정을 전라도 판군기감사에 제수해 보내는데요, 이숭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황거정은 순천에 유배된 이숭인을 남평(지금의 나주)로 잡아가서 등골을 매질해 죽입니다. 이성계는 또 손흥종을 보내 이색의 둘째아들 이종학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판관 김여지가 이종학을 돕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종학을 장사현(지금의 전락북도 고창군)으로 이배하는 척 이동시키다가 무촌역으로 자객을 보내서 살해해버립니다.
그렇지만 이성계는 그 이듬해에 이색을 유배에서 풀어줍니다.
조선왕조실록 1393년(태조 2년) 1월 21일 기사에는
‘이색이 와서 임금을 알현하고 용서해준 은혜를 사례했다.’
라고 기록돼 있는데요,
과연 이색이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고 제자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인 이성계에게 사례했을까요?
이색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세상과 연을 끊고 은거하는데요,
1395년(태조 4년) 이성계는 이색에게 쌀과 콩 1백 석을 보내며 이색을 회유합니다.
조선을 건국했지만 백성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고려의 녹을 먹던 신료들 또한 두문동(杜門洞),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의 광덕산에 있는 마을인데요,
그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은거하는 등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서 쉽게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자 몰염치하게도 이색에게 다시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전 왕조에 충성한 사람들도 모두 포용하고 화해하려고 애쓴다’
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는 쇼였죠.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이색은 이성계가 보낸 쌀과 콩을 한 톨도 받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보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색을 강제로 잡아다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이색은 이성계가 건네는 술과 음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았고,
이성계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사흘 후 이성계는 객관에 머무르고 있던 이색에게 과전(科田),
과전은 백관들에게 나눠주는 논밭인데요,
과전 1백20결과 쌀과 콩 1백말, 소금 다섯 말 등을 내리며 회유합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아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인 원수가 베푸는 부귀영화를
이색이 받아들일 리 없었겠지요. 이색은 그것들 또한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습니다.
이성계는 열흘 뒤 다시 쌀과 콩, 술과 고기 등을 내리지만 이색은 거절합니다.
이성계는 이색을 돌려보내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오고도제조에 임명하기도 하는 등 인내심을 갖고 이색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이색은 벼슬과 재물 모두 거절하고 출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술과 고기 등의 푸짐한 음식을 마련하고 다시 이색을 불러서 직접 설득합니다. 그렇지만 이색은 이번에도 역시 이성계가 주는 음식에는 입을 대지 않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지만 이색은 끝까지 음식에 입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이성계는 대나무로 만든 요여(腰輿),
요여는 시체를 묻은 뒤 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가마인데요,
그 요여를 이색에게 보냅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그 요여에 혼백이 실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겠죠?
그러자 이색은 죽음을 각오한 듯 이성계가 내린 요여만큼은 받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성계는 백관들을 불러 모아 이색을 위한 잔치를 베푸는데요,
자신이 이색을 설득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성계는 복종하지 않는 이색을 계속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다가 이듬해 5월에야 경기관찰사에게 이색을 다시 오대산에 모셔다주라고 명하는데요,
이색은 여강(驪江)
여강은 여주강이죠? 지금의 남한강입니다.
그 여강을 건너던 중 배 위에서 경기감사가 건넨 술을 마시고 쓰러졌고,
가까운 곳 신륵사(神勒寺)로 옮겨졌는데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경기관찰사를 죽여서 입막음했습니다.
이상 전은강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구조」(이기동, 성균관대학교 교수), 「목은이색의 교육사상」(李昇遠, 서울대 대학원 석사), 「목은 이색의 절의 실천과 후대의 평가」(이강석, 충북대학교 조교수), 고려사: 세가(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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