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림 시인의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
안녕하세요, 전은강입니다.
가장 처음에 실린 시가
「바람의 발자국」
이라는 시네요.
그물 무늬 신발을 신고
비릿한 갯 내음 풍기며
물 위를 떠돌다가
모래톱 둔덕에
물결 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든
바람의 발자국들
그 발에 가만가만 입 맞추는
노랑나비
피어나는 갈대꽃에 좀 전에 앉았던
김시림 시인의 시
「바람의 발자국」 전문인데요,
산뜻하네요.
그리고 뭔가 긴 여운이 남습니다.
김시림 시인의 이번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은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듯 말줄임표가 특징입니다.
이 시 「바람의 발자국」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할 말을 줄이고 입을 다뭅니다.
출근길 버스 차창에
말줄임표를 찍는 빗방울들
이렇게 시작하는 김시림 시인의
「비 오는 날」이라는 시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말줄임표로 말하는 시가 「솔방울 떨어지고」, 「다시 바다에서」
등 여러 편이 보이네요.
보이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허공,
볼 수 없어서 더욱 그리운 그 무엇처럼
<말없음으로 말하여 더욱…….>
하고 저도 나머지 말을 줄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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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림 시인이 이번에 펴낸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의 또다른 특징은
문득 멈추어 저 멀리 아득한 곳을 돌아보고,
그리고 또 문득 그곳을 향해 달려가서는,
왜 내게서 그리도 멀리까지 멀어졌느냐고
아련한 눈빛으로 묻는 모습인데요,
그리움에게 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나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있곤 했다
엄마를 기다리다 심심하면 쑥색 바위옷을 벗겨
신발에 넣고 다녔다
발바닥에 잎맥처럼 물들던 노을빛
썰물 진 갯벌
팔을 휘저어 초승달 문양을 그려가며
꼬막 잡던 엄마
깊이 빠진 장화 발자국마다
쪼그려 앉아 졸던 석양
줄지어 날던 도요새 떼 날갯짓에
파닥거리던 금빛 수평선
엄마는 석양 수평선 그리고 나를 한 광주리에 담아
밀물을 끌고 오셨다
물결 같은 기와 처마
흰 구름 몇 조각 뜬 하늘
태극무늬처럼 사이좋게 담긴 찻잔의 창가
김시림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에 실린 「창가에 앉아」라는 시인데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살았다는 시인은
창가에 앉아서 옛 시절을 돌아보며
엄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엄마가 있던 바닷가 풍경을 말이지요.
엄마가 없는 현재에서 엄마가 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인데,
그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시는 아름답고,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은 다 곱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짧은 시어로 독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시이기에
눈으로 보는 현실의 풍경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죠.
그래서 저는 시를 잘 쓰는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느림>을 권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제목이기도 한 <느림> 말입니다.
<빠름> 또한 때에 따라서는 시 창작에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되도록이면 <느림>을 권합니다.
세상을 찬찬히 봐야 하니까요.
제가 전에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철학성을 말하면서
<마음 밖에 리(理)가 없고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는
왕수인(王守仁)의 말을 전한 적 있죠.
시로 표현해야 할 대상을 내 마음 속으로 완전히 끌어들여서
찬찬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세요.
추억이면 추억, 사물이면 사물, 거기에 내 마음이 충분히 젖어서
그 대상이 내 마음 자체가 된다면
더 멋진 시어가 떠오를 겁니다.
김시림 시인은 세상을 참 찬찬히, 그리고 깊이 있게 보는 시인입니다.
그래서 <썰물 진 갯벌>에서 어머니가 휘젓는 팔 모양이
초승달 문양을 그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장화 발자국마다
쪼그려 앉아 졸던 석양>
도 볼 수 있는 것이죠.
석양이 장화발자국 속에 쪼그려 앉아 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김시림 시인은 엄마는 크나큰 존재라는 것을,
<엄마는 석양 수평선 그리고 나를 한 광주리에 담아
밀물을 끌고 오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석양, 수평선, 그리고 나를 담을 수 있는 그 큰 엄마의 광주리,
그것을 손에 든 채 밀물까지 끌고 오실 수 있는 엄마의 힘.
시인은 그것까지 보았습니다.
덩굴 사이 목련꽃 두 송이
다정히 눈 맞추는
청자 목련무늬 화병
철마다 들꽃 한 송이씩 꽃아두라던
아지랑이처럼 살랑거리는
네 말
오래전 어느 선상
썰물 진 모래톱에 나란히 누운 조개껍데기처럼
마음이 젖은 적이 있었던 우리
모래 결 같은 나를 맨발로 걷고 싶다던
가슴이 뜨거웠던 너
오늘은 찰박찰박 다시 밀물져 와선
회초리 같은 매화 가지 하나 건네줄 것만 같은
「화병을 앞에 두고」라는 시 전문인데요,
이 시에서도 말줄임표의 시어가 사용됐네요.
화병에 새겨진 목련 두 송이를 본 사람은 많겠지만
그 목련이 다정히 눈 맞추는 모습까지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역시 느리게 세상을 살폈기에 목격한 <목련꽃들의 애정행각> 아닐까요?
오래전 어느 선상에 너와 나란히 누웠던 모습도
<썰물 진 모래톱에 나란히 누운 조개껍데기>에 비유함으로써
더욱 바닷내음 짙게 해주고 있는데요.
나는 모래결 같고,
너는 그 위를 맨발로 걷고 싶다고 합니다.
청춘의 뜨거운 마음을 이처럼 잘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시림 시인이 엄마 아버지께 바친다는 이번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은
이처럼 사려 깊고 마음 따뜻한 정서의 시들로 가득 차 있는데요,
제가 여기서 너무 많이 소개해버리면 시집이 팔리지 않을 것 같아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설가 전은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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