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9일 일요일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영화 <암살>에서의 등장인물 안옥윤의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죠? 전지현이 연기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제인물이라고 합니다.
 
남자현 지사는 187212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남정한(南珽漢)이고, 어머니는 이원준(李元俊) 딸 진성이씨 입니다. 진성이씨는 진보이씨라고도 하는데요, 퇴계 이황도 진성이씨입니다.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은 1831(순조 31)에 태어났습니다. 자는 운보(雲甫)이고, 호는 수회(守晦)입니다. 남정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통정대부라는 것은 정3품 상계(上階) 품계명이고,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던 관서지요.
 
참고로, 당시의 왕세자는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척(李坧)이었습니다. 이척은 후에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에 오르게 되는 순종입니다.
 
 
남자현 지사의 생가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석보로 208에 위치해 있는데요, 이 생가는 19991130일 후손들이 복원했다고 하는데요,
 
생가는 팔작지붕의 8칸으로 보이는 본채와 5칸 규모의 문간채가 있고,
 
 
 

 
 
 

 
본채 뒤편에 맞배지붕 3칸 추모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가 옆에 순국비가 있습니다.

 
 

 
 
 
  
 
 
남자현의 본관은 영양이며, 1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은 불매서원이라는 서원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서원이 지경리에 있었다고 하니 이 근처 어디일 것입니다. 일곱 살에 한글을 깨쳤다는 남자현은 여덟 살부터 한문을 배웠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글을 익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역시 아버지의 불매서원에서 아버지의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익힌 걸까요? 열두 살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고, 열네 살에는 사서(四書)를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까지 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식까지 갖추게 된 남자현은 열아홉 살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영주(金永周)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남편 김영주 또한 안동 일직면에서 태어났으나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답곡으로 가서 살며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에게서 수학했다고 합니다.
지경리 답곡으로 시집을 간 남자현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불과 5년 후인 스물네 살에 남편 김영주가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하고 맙니다.
 
영양군 입암면 흥구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당시는 행정구역이 진보군이었습니다. 바로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가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한 곳입니다. 이른바 <흥구리전투>, 혹은 <진보전투>로 불리는데,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고, 김영주 뿐 아니라 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남자현은 이때 외동아들 김성삼(金星三)을 임신 중이었습니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는 본관이 의성이며, 호는 국오, 1862년 안동군 일직면 귀미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872년 생인 남자현과는 꼭 10년 차이가 납니다.
 
 
남자현이 김영주와 혼인하고 아직 신혼의 티를 벗지 못한 1895,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또 단발령이 내려집니다. 조선의 온 국민이 분격하여 떨쳐 일어나죠. 그래서 전국에 의병이 봉기하게 됩니다.
 
 
구한말 일어난 항일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1차 을미의병이 있고, 1905년의 을사늑약,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려고 강제 체결한 조약이죠, 이 을사늑약으로 촉발된 2차 을사의병, 그리고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3차 정미의병이 있는데요, 이때 일어난 의병은 1차 을미의병이었습니다.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 또한 일본의 만행에 분격하여 70여 명의 제자들에게 나아가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합니다. 스승의 독려에 제자들은 무장을 갖추고 영양출신 의병장 김도현이 이끄는 선성의병(宣城義兵)에 들어가서 싸우게 되는데요,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가 불매서원 출신 의병을 비롯하여 유생의병들을 지휘하게 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소대장이나 중대장 쯤 되었을 것 같습니다.
 
 
선성의병장 김도현(18521914)은 본관이 김녕(金寧: 김해)이고, 자는 명옥(鳴玉, 또는 明玉)이며, 호는 벽산(碧山)입니다.
 
이때, 영양과 안동, 그 주변의 의진들은 서로 연락하여 연대하고 안동에 들어온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안동 입성작전을 계획하게 되고, 이를 위해 연합부대를 창설합니다. 그래서 류난영이 안동도총에 세우고 김도화를 대장에 추대하는데요, 김도현은 중군장을 맡게 됩니다. 김영주는 당연히 중군장 휘하의 지휘관이었겠죠. 이 연합부대가 쳐들어가자 안동으로 들어왔던 일본군은 깜짝 놀라 상주로 퇴각합니다. 그래서 연합부대는 안동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연합의병은 내친 김에 상주로 가서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신무기를 당적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일본군은 안동에 입성한 연합의병이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도록 즉시 반격에 나섰고, 관군도 일본군과 연합하여 의병을 공격합니다. 일본군 신무기에 더해 관군까지 가세하자 연합의병은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다 판단하고 각자 흩어져 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안동은 다시 일본군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벽산 김도현 의병장이 이끄는 선성의병도 영양으로 돌아가서 의진을 정비하는데요, 그런데 이때 강릉에서 창의한 민용호 의병장의 관동창의진이 함경도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안변의 선평에서 일본군 기습을 받고 패퇴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울진의병, 삼척의병, 정선의병 등이 관동창의진을 돕기 위해 달려가고, 김도현 의병장이 이끄는 선성의병도 달려갑니다. 이들의 가세로 힘을 얻은 관동창의진은 삼척에서 대대적으로 반격해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일본군을 쫓아서 함경도 함흥까지 밀고 올라가게 되는데요, 그러나 김도현 의병장은 영양에 들어온 일본군과 싸워야 하기에 북진작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반격에 성공하는 것까지만 도운 후 빠져서 영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양으로 돌아온 선성의병은 입암과 소청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는데요, 김영주는 이듬해인 1896711일 흥구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선성의병은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권고로 1015일 해산합니다.
임신 중이던 남자현에게 남편 김영주가 전사할 당시 입었던 피적삼이 전해집니다. 피적삼을 받아든 남자현은 통곡하며 원수 일본에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 피적삼은 후에 남자현이 하나 뿐인 아들 김성삼의 손을 잡고 만주로 망명할 때 가슴에 꼭 품고 갔으며, 일본군과 싸울 때도 속에 그 피적삼을 입고 싸웠다고 합니다.
 
남편을 잃은 후 남자현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남편은 2대독자, 아들 김성삼은 3대독자였습니다. 2대독자 김영주가 전사했으므로 시부모를 모실 사람은 남자현 밖에 없었습니다. 남자현은 누에를 키워서 생계를 꾸렸는데요, 시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했으므로 진보군, 지금의 청송군이죠, 진보군에서 효부표창을 내렸다고 합니다.
석보면은 원래의 행정구역이 영해군, 지금의 영덕군이었고,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 영양군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경리 중에서도 답곡리는 진보군과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당시 진보군에 속했고, 그래서 진보군수로부터 효부표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아들 김성삼도 어느듯 성인이 되어 있었죠.
남편이 전사하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자현은 묵묵히 시부모님만 봉양했을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동에서 영양으로 가는 길목에 천전리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천전리라는 말은 내앞마을이라는 뜻입니다.
1910829일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다는 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한 날이죠. 바로 경술국치인데요, 경술국치가 있고 그 이듬해인 1911년 의성김씨 집성촌인 이곳 천전리 주민 대부분이 사라지고 마을이 텅 비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남자현의 남편이 전사하고 5년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천전리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김동삼(金東三). 본명은 김긍식(金肯植). 유명한 독립운동가죠. 바로 그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망명단을 이끌고 만주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동삼은 1878(고종 15) 경북 안동의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는데요, 1907년 안동의 근대식 협동학교 교감을 역임했고, 비밀결사 신민회와 대동청년단 활동을 했습니다. 1910829일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기자 전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뜻을 같이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망명을 추진했습니다. 대규모 망명단이 꾸려졌는데, 안동 천전마을 의성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가량이 망명단에 합류했습니다. 영덕의 무안박씨, 울진의 평해황씨, 영양의 한양조씨 문중도 이들 대열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규모였겠죠?
 
 
망명단을 이끌고 만주로 간 김동삼은 통화현 삼원보에서 이상룡,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했고, 독립군 기지로 삼기 위해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여준, 이탁, 이상룡 등과 함께 남만주 동포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조직했으며, 서일, 여준, 김좌진 등과 함께 민족 대표 39인으로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천전리가 석보면과 매우 가깝다는 점, 그리고 남자현 열사의 남편 김영주 또한 의성김씨라는 점입니다. 김영주는 1872년생, 김동삼은 1978년생. 김영주가 김동삼보다 여섯 살 위이군요.
물론 남자현과 김동삼의 직접적 관계가 증명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후일 김동삼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검거됐을 때 남자현 열사가 친척이라고 하면서 면회하고 옥바라지하게 되는데요, 일본경찰이 친척이라는 남자현 열사의 말을 무조건 믿고 면회를 허락했을까요? 친척이라는 증거, 혹은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있었기에 친척으로 인정하고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동삼이 김영주의 혈족이라는 일설이 근거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시점에서 왜 김동삼 얘기를 꺼내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후에 만주로 망명한 남자현이 곧장 김동삼을 찾아가기 되고, 줄곧 김동삼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자현이 영양에서 20여 년간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을 키우며 아무른 항일투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느닷없이 김동삼을 찾아 그 머나먼 만주로 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남자현은 김동삼이 망명단을 이끌고 망명할 때 자신도 만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고 싶었겠지만 시부모님을 남기고 갈 수 없어서 차마 못 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자현은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을 키우는 20여 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못하고 지하활동을 했겠지요. 그것은 독립자금 모금, 연락책, 정보수집 등의 은밀한 첩보활동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냥 했을까요? 만주의 김동삼의 지령에 따라 활동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어쨌거나 시부모님 봉양 의무에서 벗어난 남자현은 남편이 죽고 22년이 흐른 1919년에 남편 김영주의 피적삼을 꺼내 가슴에 품고 아들 김성삼과 함께 머나먼 만주를 향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오랜 계획의 실천이었을 겁니다.
 
 
1919년이면 남자현의 나이가 마흔여덟 살인데요, 독립운동을 하기엔 적은 나이가 아니죠.
남자현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래 만주로 가기로 결심했고, 19192월 말 서울 김모 부인의 밀서를 받고 상경하게 됩니다. 김모 부인의 밀서. 이것은 독립군의 국내 지하조직이 존재했으며, 남자현이 그들과 연이 닿아있었다는 실증이 되겠지요. 󰡔부흥󰡕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요, 그 잡지에서도 후에 기사에서 예의 김모 부인 거론하며 여성동지라고 칭했습니다.
아들 김성삼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남자현은 여성동지 김모 부인으로부터 정동교회 목사 손정도를 소개받습니다. 그리고 손정도의 도움으로 망명 절차를 밟습니다. 일본경찰을 따돌리기 위한 가짜신분증, 기차표 등이 준비되었겠죠.
연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동지들을 만나 기미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뿌리고, 31일엔 태극기를 들고 보신각에서 만세운동을 합니다. 대한독립만세!
만세운동에 동참한 후 39일 김성삼과 함께 만주 단동, 지금의 랴이오닝성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릅니다. 단동역에서 내려서는 손정도가 일러준 대로 마차를 타고 길림성 통화현의 김기주 씨 집을 찾아갑니다. 김기주, 손정도, 김모 부인. 이 라인이 김동삼과 국내 지하조직의 연락망이었을 것입니다.
남자현과 아들 김성삼은 김기주 씨 집에 머물며 김동삼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 김동삼이 보낸 안내인이 와서 두 사람을 서간도 유하현으로 데려갑니다.
 
 
만주로 망명한 후 김동삼은 신흥강습소, 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는데요, 여기서 김동삼의 활동을 조금 더 정리를 하고 갈까요?
김동삼은 1922년 대한통의부(統義府) 위원장으로서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북경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참석해서 독립단체의 통합을 설득했고,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 참모장 겸 행정위원으로 활동합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됐지만 사양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칩니다.
 
 
1928년에는 김좌진, 이규동, 현정경 등과 함께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열었고,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과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냅니다.
이상의 활약에서 보듯이 김동삼은 독립단체 통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요, 그 이유는 당시 만주에만 약 90여 개의 독립단체가 있을 정도로 난무해서 질서 없이 너도 나도 개별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파벌싸움도 극심해서 자기들끼리 다투느라 정작 일본과는 제대로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도 통합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물고 찢는 그 광경을 보며 김동삼은 통탄했고, 통합으로 체계화된 항일투쟁의 절박함을 절절히 느끼고는 힘 있는 각 단체의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설득하고 하나의 당으로 힘을 뭉쳐야 한다며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 김동삼 선생이 이렇듯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호소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남자현이 만주로 왔습니다. 김동삼 선생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죠.
 
 
 
남자현은 곧바로 서로군정서에 입단하여 참모장 김동삼의 측근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아들 김성삼을 서로군정서 산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키죠.
신흥무관학교 생도 김성삼은 지청천 장군의 지도로 독립군 장교가 되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은 남자현의 무엇을 믿고 바로 측근으로 삼았던 것일까요? 기밀유지가 생명인 독립군 지도자가, 독립군을 때려잡으려 혈안인 일제경찰이 수시로 독립군 지원자로 가장한 정보원을 독립군에 침투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다만 동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토록 깊은 신뢰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전부터, 아마도 20여 년 전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지냈고, 깊이 신뢰할 만한 관계를 쌓았기에 남자현 열사는 김동삼 선생 하나만 믿고 과감히 그 머나먼 망명길에 올랐을 것이고, 김동삼 선생은 또 그 먼 길 달려온 남자현을 측근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군정서라는 기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서로군정서는 19195월에 설립된 무장독립투쟁 기관인데요, 무장독립투쟁기관이라고 하면 독립군 조직이겠죠. 원래는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남만주 독립운동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였지만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름을 서로군정서로 변경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서로군정서 초대 국무령은 김동삼과 동향인 이상룡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무장 이탁(李鐸),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혹은 이청천), 참모장 김동삼, 군무장 양재훈(梁在薰) 등이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사령관인 지청천, 혹은 이청천 장군은 여러분도 잘 아시죠? 호는 백산(白山)이고,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입니다. 일본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졸업했고,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합니다. 그 후로도 무장독립투쟁을 선두에서 이끌며 조국 독립에 온 몸을 바치셨습니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유하현에 그 본부가 있었습니다. 남자현은 그 서로군정서 참모부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망명 이듬해인 1920829일 만주에서 국치기념대회가 있었는데요, 그때 남자현 지사가 한 일을 보면 서로군정서에서의 역할도 대충 짐작이 갈 겁니다.
남자현은 1천여 명이 참석한 국치기념대회 대회장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분열을 질타하는 내용의 혈서를 쓰고 그것을 읽으며 단결을 호소하는데요, 현장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절단하여 그 피로 쓴 혈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자현은 김동삼 참모장을 도와서, 독립단체들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뭉쳐 단결된 힘으로 일본에 맞서게 하려는 통합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당시 서간도에는 40여 개가 넘는 단체에 수천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이념적으로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들 사이의 갈등도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서북파, 기호파, 안니파, 이파, 개조파, 창조파 등이 대립하고 충돌해서 동포끼리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요즘 정치도 다를 바 없겠죠?
남자현이 자신의 왼쪽 엄지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단결을 호소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에 개탄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회에 모인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했고, 서로 단결을 약속합니다.
남자현의 노력으로 얼마 후에는 각 단체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그리고 대한독립단이 뭉쳐 대한통군부를 출범시키게 됩니다.
 
 
 
이 즈음, 김동삼의 지시를 받고 독립단체들을 찾아다니며 김동삼의 말을 전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던 남자현은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인 홍 순사에게 검거되기도 합니다. 당시 지청천 장군이 왕청현에 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령관 지청천 장군을 만나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호탄현, 지금의 신장 위구르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홍 순사에게 검거되었습니다. 그런데 홍 순사라는 작자는 남자현을 간도일본총영사관이 아닌 자기 집으로 연행해가서 심문합니다. 그러나 남자현은,
그대는 순사이고 나는 아녀자인데, 어찌 함부로 연행하는가!”
하고 홍 순사를 호통 칩니다. 그리고는 조선인으로서 일본경찰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 신분은 일본경찰이더라도 독립운동을 도우라고 설득합니다.
남자현 지사는 아마도 달변이었던 듯합니다. 남자현의 설득에 감복한 홍 순사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여비 70원을 손에 쥐어주며 풀어줍니다. 이 이야기는 잡지 󰡔부흥󰡕194812월호에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남자현이 달변이었다는 사실은 손자 김시복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려졌습니다.
남자현이 아들 김성삼과 함께 어디론가 가다가 조선인 밀정에게 뒤를 밟히게 되는데요, 남자현은 오줌을 누는 척 가지밭으로 들어가서 가지를 하나 따서 그것을 보자기에 싸고 권총인 것처럼 하고 미행하는 밀정에게 겨누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쏜다고 위협해서 집으로 데려갔고, 조국을 배반하지 말라고 두 시간동안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감복한 밀정은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고 갔다고 합니다.
 
 
 
국치기념대회가 열리고 두 달이 채 안된 1021일부터 26일까지 독립군은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선발대를 대파하고, 완루구의 일본군 본대를 격퇴한 후 천수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사단본부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둡니다. 이른바 청산리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생도들로 구성된 교성대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해 벌인 전투였습니다.
 
 
 
남자현의 아들 김성삼도 당시 신흥무관학교 생도였으므로 이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적을 대파해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우리 독립군도 90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남자현은 청산리전투 부상병들을 돌보러 달려가고, 어머니의 손길로 극진히 치료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아들의 동지들이니 내 아들처럼 볼보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하여 33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이 오를대로 오른 일본군은 조선 민간인 학살로 보복을 단행합니다.
1028일 새벽에 무장한 일본군 1개 대대가 간도의 예수교 마을을 포위하고 집에 불을 지른 후 뛰쳐나오는 사람을 무작정 몽둥이로 때려서 죽입니다. 도망치는 사람은 붙잡아서 불타는 집에 던져 넣어 태워 죽였습니다.
 
 
 
일본군은 봉천과 홍경, 왕청, 대황강, 탄박강, 동대파자 등 남만주 일대를 돌며 이 잔혹한 학살을 이어갑니다. 그리고는 대대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나섭니다. 그래서 1921, 그러니까 이듬해에 길림성 액목현의 삼송 육도구라는 곳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다시 전투를 하게 되는데요, 남자현은 직접 총을 들고 이 전투에 참가합니다.
 
 
 
사태가 이지경임에도 독립단체간의 갈등은 여전해서 1922년엔 화인현과 남만 등지의 독립군끼리 충돌해서 유혈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동안의 통합노력이 무색해진 것입니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남자현은 금식기도를 하면서 또 하나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이번에는 집게손가락인데요, 단지한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로 혈서를 써서 다시 한 번 독립운동 진영에 단결을 호소하며 화합회의를 요구합니다. 유혈사태 책임자들은 남자현의 충절에 감격하여 회의에 응하게 되고, 남자현의 중재로 화합을 다짐하는 합의문을 발표합니다.
독립진영의 화합으로 갈등에서 벗어난 동포들은 곳곳에 목비를 세워 남자현의 공덕을 기렸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민간인학살과 계속된 독립군 토벌로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무장투쟁이 위태롭게 되자 대한통의부는 상해임시정부와 연대해 참의부를 결성하고, 1924년에는 군정서, 의우단, 광정단,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등과 연합하여 정의부를 출범시킵니다. 남자현도 김동삼을 따라서 정의부에 몸담게 됩니다.
 
 
 
1925, 남자현은 채찬,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계획을 세웁니다. 4인조 암살단장 남자현은 4월 중순 김문거라는 동지에게서 권총과 포탄 등을 건네받고 암살단을 이끌고 서울로 잠입합니다. 그리고는 혜화동 28번지 고 씨(高氏) 집에 숨어서 사이토 마코토의 일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사이토 마코토가 당시 순종이 머물던 창덕궁으로 올 때 거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남자현 암살단이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 직전 국내에서 사이토 마코토의 목숨을 노린 또 다른 암살단이 저격했으나 실패해버렸고, 일본경찰의 경비가 강화됩니다.
남자현은 동지들과 함께 교회 다락에 숨어 지내지만 정탐을 나갔던 박청산이 경찰 미행을 당하게 되자 암살단 정체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암살단 동지들은 각자 흩어져서 만주로 돌아갑니다.
이때는 김동삼이 정의부 참모장 겸 행정위원으로 있을 때입니다. 김동삼은 미국에서 건너온 안창호와 함께 좌우익 연합 유일당운동을 벌이고 있었죠.
안창호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 확장을 위해 길림성을 방문합니다. 김동삼과 오동진, 이철, 김이대, 고할신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만주로 돌아온 남자현도 정의부 중앙대표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그 모임이 공산주의자들의 집회라고 주장하며 길림성 당국에 모두 구속하라고 요구합니다. 길림성 당국은 일본의 압박에 모임에 참가한 독립지도자 47명을 연행해서 구속시켜버렸습니다. 다행히 남자현은 길림성 당국의 검거를 피해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남자현은 즉시 길림사건 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임시정부와 연대하여 구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김동삼과 안창호를 면회하고 옥바라지도 했습니다. 남자현이 이끄는 길림사건 비상대책반은 중국의 여러 언론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기사화시키며 강력히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중국 신문들이 길림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중국 학생과 여러 단체들은 대한독립지도자들을 일본경찰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는 길림성 당국에 그들을 석방하라고 압박하게 되지요. 그러자 북경정부를 장악한 대원수 장작림이 길림성 당국에 대한독립지도자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김동삼과 안창호 등 47명 전원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일본경찰에 넘어가기 직전의 독립지도자들을 무사히 구출한 남자현 지사.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때 대한독립운동 진영은 지도자들을 모두 잃었을 것이고,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했을 겁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는데요, 만주사변이 그것입니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공한 이유는 대한독립군 토벌을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은 만주를 접수한 후 만주국 설립을 추진하면서 관동군을 앞세워 독립군 토벌을 대대적으로 실시합니다. 그러자 국제사회가 일제히 일본의 만주 불법점령을 비난하게 되고, 국제연맹에서는 특별조사단을 만주로 파견합니다.
당시 김동삼은 한국독립당 고문으로 있었는데요, 남자현은 김동삼, 그리고 김동삼 선생의 사돈인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으로 잠입합니다. 국제연맹 특별조사단을 만나 일본의 만주 불법점령 뿐 아니라 조선 강제점령도 조사해야 한다고 호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첩보를 접한 일본경찰은 남자현과 김동삼이 은신해 있을 것 같은 장소를 이 잡듯이 수색했고, 결국 정인호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있던 김동삼과 이원일은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그러나 남자현은 이때 공작을 위해 외출 중이었기에 검거되지 않았습니다.
일본경찰은 검거망을 빠져나간 남자현을 잡기 위해 수배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남자현은 검거를 두려워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김동삼 구출작전을 준비하고, 신분을 위장하고 버젓이 일본경찰서로 가서 김동삼을 면회합니다. 왜 검거될 위험을 무릅쓰고 김동삼을 면회한 것일까요? 김동삼에게 구출작전을 알려서 손발을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하는 면회에서 대놓고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독립군 작전 때 사용하던 암호로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일본경찰이 김동삼을 신의주로 이송한다는 첩보에 따라 남자현은 무장을 갖춘 동지들과 함께 신의주행 열차에 오르지만 그 열차에는 김동삼이 없었습니다. 남자현과 독립군 동지들이 신의주행 열차에 오른 사이 일본경찰은 다른 경로를 통해 김동삼을 본국 평양으로 이송해버립니다. 그래서 남자현의 김동삼 구출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김동삼은 평양지방법원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평양지방법원은 김동삼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형이 확정되자 일본은 김동삼을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하고 모진 고문을 하며 독립군에 대한 정보를 캐려 합니다. 그러나 김동삼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고문으로 병이 들어 양력 1937413일 옥중에서 순국하고 맙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김동삼은 국내 전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한 후 일가친척 모두를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일본은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찾아가라는 신문공고를 내지만 아무도 인수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는 일가친척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김동삼의 오랜 동지이자 친구인 만해(萬海) 한용운,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분이죠, 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유해를 인수해갔고,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심우장,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유택이죠, 바로 그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릅니다.
일송(一松). 소나무 한 그루. 일송은 바로 김동삼 선생의 호입니다.
 
나라 없는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일송 선생은 이 짧은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셨습니다. 그래서 만해 선생은 그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하고 한강에 뿌렸습니다.
 
 
 
남자현 지사와 일송 김동삼 장군. 서로군 참모장이었으므로 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일송 장군의 측근 중 측근이었던 남자현 지사는 가장 큰 동지가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그리고 구출작전에 실패한 후 엄청난 심적 고통이 있었겠지만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일송 장군의 뜻을 이어받아 계속 독립운동을 이어갑니다.
일송 장군이 마지막으로 하려고 했던 일. 그것은 국제연맹 특별조사단에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점령 부당성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자현은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조사단이 묵고 있던 마디얼호텔로 접근을 시도합니다.
조사단은 영국 리튼(V.A.G.R. Lytton)경이 단장을 맡았고, 조사단원으로는 이탈리아 사람인 알드로반디 백작, 프랑스 H. 클로델 중장, 미국의 F.R. 맥코이 소장, 독일의 H. 슈네 박사 등이 임명되어 만주로 급파되어 있었는데요, 일본경찰은 그들이 묵고 있던 마디얼호텔 주변을 삼엄하게 경비하여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당시 남자현 뿐 아니라 김곡이라는 독립지사도 조사단 접촉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했습니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조사단 접근이 여의치 않자 남자현 지사는 세 번째 단지를 선택합니다. 왼손 무명지, 약손가락이죠, 약손가락 2절을 잘라서 그 피로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무명지와 함께 옥양목에 쌉니다. ‘조선독립원.’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미리 매수한 인력거꾼에게 전달하고 조사단장 리튼 경에게 전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마디얼호텔에 들어가는 인력거까지 샅샅이 수색했고, 그 수색에서 남자현의 혈서가 발각되고 맙니다.
 
 
 
193231일 일제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지죠. 남자현은 그 이듬해인 1933120일 문익빈, 이규동, 이춘기, 손보현 등의 동지들과 함께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로 합니다. 거사일은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일인 31일이고, 장소는 기념 행사장이었습니다. 남자현은 이 의거에서 무기운반책을 맡아 227일 오후 4시에 길림성의 붉은 천이 달린 집에 무기가 든 상자를 전달하기로 합니다.
222일 남자현은 암살단 동지들과 함께 무송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남길 기념사진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동지들과 함께 거사 장소를 둘러보며 최종점검을 마쳤습니다.
마침내 227일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날, 일본경찰의 조선인 첩자 이종현이라는 자가 암살단의 계획을 눈치 채고 일본경찰에 그 사실을 알렸고, 일본경찰은 암살단 동지 손보현이 숨어 있는 곳을 급습해서 손보현을 체포했습니다. 또한 남자현과 문익빈, 이규동, 이춘기 등의 나머지 암살단원들을 검거하기 위해 찾고 있었죠.
62세의 남자현은 손보현 동지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남편의 피적삼을 속에 입고 거지로 위장하고 은신처를 나섭니다. 권총 한 자루와 탄환, 폭탄 두 개를 몸에 숨긴 채 말이지요.
 
 
 
남자현은 하얼빈을 지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고,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남자현은 그 모진 고문에도 진술을 거부하고 8월까지 버티다가 결국은 죽음을 각오합니다. 그래서 86일부터 14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해서 생명이 위태롭게 됐습니다.
독립군 지하공작단 거물급으로부터 고급정보를 캐내야 할 입장인 일본경찰은 남자현을 살리기 위해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시킵니다. 그러나 남자현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
라고 말하며 끝내 치료를 거부합니다.
남자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일제경찰은 남자현을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옮겨주고 감시경력을 철수시켰습니다. 포기한 것이죠.
그제야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뵈러 달려왔습니다.
1933822, 남자현은 손자 김시련을 불렀고,
독립은 정신에 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잠자듯 운명했습니다.
 
 
참고로, 남자현의 아들 김성삼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장교로 활동했으며, 6·25전쟁에도 장교로 참전했지만 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1953년에 포로교환으로 돌아왔고, 대령으로 예편했다고 합니다.
 
참고: 47살에 만주 항일무장투쟁 뛰어든 여걸(한겨레신문, 1991,02,01), 󰡔나는 조선의 총구다󰡕(이상국 저, 세창미디어. 2012,5,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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