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9일 일요일

문헌기록으로 살펴본 어을우동(於乙宇同) , 어우동

문헌기록으로 살펴본
어을우동(於乙宇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의 성종 11615일 기사에,
 
<좌승지 김계창이 태강수의 버린 아내 박씨를 추포하여 법에 처치하도록 건의하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들어와 일을 아뢰니,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들으니, 태강수(泰江守)의 버린 아내 박씨(朴氏) 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追捕)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方山守)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포(追捕)하여 법에 처치하여야 합니다."
 
하니, 주상께서,
 
"가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기사인데요, <태강수의 버린 아내 박씨>는 어을우동을 말함이고, 태강수는 왕의 종친 이동(李仝)을 말함입니다.
이에 임금이 <끝까지 추포하라!>라고 엄히 명하는데요,
그 이유야 여러분도 다 아실 테니 생략하고요,
 
 
 
다른 문헌을 찾아보니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어우동 이름이 보이는군요.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이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버렸다.
 
그 여자는 이때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아름다운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자기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마님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라고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마침 그녀가 봄놀이를 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서 적었다.
 
물시계와 풍경소리 밤기운에 청아한데(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 선명도 하다(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롭고 조용한 방에 남아 있는 향기(間房寂謐餘香在)
지금 표현하라면 꿈속의 정이라 하겠네(可寫如今夢裏情)
 
그 외에도 조정의 관리,
유생(儒生)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었으며,
먼 곳으로 귀양 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자
(임금이) 고관대작에게 의논하게 명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 보냄이 합당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형()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마님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히긴 했으나
반가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었으므로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이 용재총화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박어우동(朴於宇同)은 정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1480, 성종 111018일에 강상죄(綱常罪)로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강상죄라고 하면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윤리를 거스른 죄라는 뜻인데요,
 
삼강은 알다시피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부부의 도리를 말하고,
오상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합니다.
 
흔히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고 부르는데요, 가문에서 파문을 당했으므로 성을 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우동은 본관이 음성(陰城)이고, 충청도 음성군 음죽현 출신이고,
 
아버지는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박윤창(朴允昌)인데요,
승문원은 조선시대 외교문서 담당 관청이고, 지승문원사는 종3품입니다.
제법 잘 나가던 사람의 딸이었네요.
 
 
 
그렇다면 어을우동에 관한 문제를 두고 조정의 의논은 어땠는지 볼까요?
 
성종 1179,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법에 의하면 장() 1백 대, () 3년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장()은 속()바치게 하고, 고신을 거두고서 먼 지방에 부처(付處) 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입니다.
<장은 속바치게 하라>라는 말은 장을 치는 대신 바치는 돈, 즉 속전을 내게 하라는 뜻이고,
부처는 거주지를 한정시키는 것으로, 귀양살이의 일종입니다.
 
어을우동이 시 잘 짓는 방상수 이란과 사통했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나왔고요,
태강수 방산수 수산수 하는 것을 보니 다 종실이네요.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강창(朴强昌홍찬(洪璨) 등이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간통하고도 굳이 숨기고서 자복하지 않고, 어을우동이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정숙지(鄭叔墀김휘(金暉지거비(知巨非)를 간통하고도 은휘(隱諱)하고서 승복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벌을 가하고, 어유소 등을 아울러 국문하소서."
 
하니, 박강창·홍찬·어을우동 등은 형을 가하고, 어유소·노공필·김세적은 아직 추문(推問)하지 말고, 김칭·정숙지·김휘는 먼저 추문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 또한 󰡔조선왕조실록󰡕 711일 기사인데요,
연루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죠?
 
 
이덕숭(李德崇) 등이 또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이 어을우동을 간통한 일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산수(方山守)가 자기 죄를 면하고자 거짓을 끌어댄 것인데, 어찌 가볍게 믿고 갑자기 재상을 옥에 넣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727일 기사인데,
방산수 이란이 죄를 면하고자 거짓자백을 했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가 개입됐을 소지도 있다는 얘기겠죠.
 
사건은 달을 넘겨 8월달로 이어집니다. 84,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김윤종(金潤宗)이 와서 아뢰기를,
 
"김칭(金偁)이 어을우동과 간통한 것은 실정과 형적이 거의 드러났는데도
석방을 명하시니 매우 불가합니다.
청컨대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어을우동을 형구로 심문하고,
어유소(魚有沼)와 김칭을 아울러 국문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유소와 김칭은 모두 방산수의 무고(誣告)에서 나온 것이니 국문할 수 없고,
방산수는 종친이니 형구로 심문할 수 없다.
어을우동이 음란하고 더러운 것은 전고에 없는 것이니
마땅히 죽여 그 시체를 내걸어야 하는데,
곤장을 치면 맞다가 죽을 수도 있으므로 형구를 쓸 수 없다."
 
하였다.
 
 
 
반드시 어을우동을 교형에 처하겠다는 임금의 의지가 매우 강한데요,
반대로 어유소와 김칭은 이란의 무고라고 감싸고,
이란은 또 종친이라고 감싸네요.
 
 
 
그리고 또 다시 달을 넘겨 92일이 되었습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버린 처() 어을우동(於乙宇同)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 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오종련(吳從連)과 감의형(甘義亨),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
 
양인(良人) 이근지(李謹之), 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한 죄는,
법이 결장(決杖) 1백 대에,
유배 2천 리()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종친(宗親)의 처()이며 사족(士族)의 딸로서
음욕(淫欲)을 자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해야 합니다.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는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로서
음행(淫行)이 매우 심한 경우에 한하여 극형에 처했으나,
그 뒤로는 모두 법에 의해 단죄(斷罪)하였으니,
지금의 어을우동 또한 법으로 단죄하소서."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의 죄는 법으로 상고하면 사형(死刑)에는 이르지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淫行)이 이와 같은 것은 삼강오상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후인의 감계(鑑戒)가 되게 하소서."
 
했다.
 
 
 
어을우동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더욱 늘어나 있군요.
김국광(金國光), 강희맹(姜希孟),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한계희(韓繼禧)
이극배(李克培) 현석규(玄碩圭) 등도 모두 법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는데요,
모두 임금의 뜻이 강경하므로 그 뜻에 따른 의논이었습니다.
신하들 말을 들은 후 임금은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그 뜻을 묻습니다. 그러자,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은 대답하기를,
 
"어을우동은 귀천(貴賤)과 친척(親戚)을 논()하지 않고 모두 간통을 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좌승지(左承旨) 채수(蔡壽)와 좌부승지(左副承旨) 성현(成俔) 등은,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중()하지만, ()을 헤아려보면 사형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을 지키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하여 그 믿음이 사시사철 한결같게 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만약 극형에 처한다면 법이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를 꺼림이 없게 하였는데,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후일 사람들이 어떻게 징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사율(死律)을 적용하여 아뢰게 하라."
 
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을우동은 끝내 1018일 형이 확정되어 교형에 처해집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어을우동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을우동을 교형(絞刑)에 처했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 동에게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
 
태강수동이 일찍이 은장[銀匠]을 집에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을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태강수동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는데,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산다면 얼마나 산다고 그토록 상심해서 탄식합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사람은 일찍이 사헌부(司憲府) 으뜸아전이 되었고,
용모(容貌)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오며,
족계(族系)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配匹)을 삼을 만합니다.
마님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마님을 위해서 불러 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고개를 끄덕렸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불러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하였다.
 
또 일찍이 변장을 하고 방산수 란()의 집 앞을 지나다가,
란이 맞아들이므로 간통하였는데,
정분이 매우 두터워서
란이 자기 팔뚝에 이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이름을 새겼다.
 
또 단옷날에는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
 
하였더니, 계집종이,
 
"내금위(內禁衛)의 첩()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남양(南陽)에 있는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정을 통했다.
 
전의감(典醫監) 생도 박강창이 종을 파는 일로
어을우동 집에 가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을우동이 박강창을 나와서 보고 꼬리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李謹之)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는 마음을 품고는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 구전(具詮)이라는 사람이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자기 집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잡고 익실(翼室)로 들어가서 간통하였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이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寢房)에 들어갔는데,
비파(琵琶)가 있기에 그것을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姓名)을 묻자,
 
"이 생원이오."
 
라고 대답했다. 어을우동이말하기를,
 
"장안에 이 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성명을 알겠소?"
 
하므로, 이승언이대답하기를,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 생원을 누가 모른단 말이오?"
 
라고 했고,
마침내 함께 잠자리를 함께 했다.
 
학록(學錄) 홍찬(洪璨)이 처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축하행진을 할 때 방산수 집 앞을 지나가게 됐는데,
어을우동을 슬쩍 엿보고는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뒤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어을우동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고,
홍찬이 마침내 그 집으로 따라가서 간통하였다.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났는데,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 집에 이르러 간통하였는데,
어을우동이 사랑하여 또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密城君)의 종 지거비(知巨非)가 이웃에서 살았는데,
틈을 타서 간통(奸通)하려고 마음을 먹었고,
어느 날 새벽에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장차 큰 옥사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 들여 간통을 했다.
 
이때 방산수 란이 옥중에 있었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의 감동(甘同),
 
(감동은 평양현감 최중기의 아내로서 서른아홉 명과 간통한 창기인데요)
 
감동은 정부가 많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부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난도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을 끌어대었으나,
모두 증거가 없어 벌을 면하게 되었다.
 
방산수난이 공술(供述)하여 말하기를,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가까이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하여 옥반지를 주어 신표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사직동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를 빌려 정을 통했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이 있을 것을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은 다만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너무 심할 뿐이다."
 
하였다.
 
 
 
방산수 이란이,
정부가 너무 많아서 모두 처벌할 수 없으므로 중죄를 주지 않았던 감동의 예를
어을우동에게 상기시키며 간통한 남자를 무조건 많이 끌어다 불라고 시켰다는 얘긴데요,
 
어을우동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해서
사실은 관계하지 않은 남자들까지 그 이름을 대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조선 성종 연간에 활동한 남효온(南孝溫)의 문집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런 기록이 있거든요.
 
 
 
경자년에 사족(士族)의 딸 어우동(於宇同)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와 간통한 선비가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입에서 생원 이승언(李承彦)이름이 나왔으므로
그도 연루자로 곤장을 맞고 억지자백을 해야 했다.
 
이 생원이 형장(刑杖)을 맞는 자리에 꿇어앉아,
 
옛 사람 말에, 남자가 원한을 품으면 6월에도 서릿발이 날린다고 했는데,
하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하늘 아닙니까!
내 죄가 이리도 원통한데 어찌 하늘의 변괴가 없는 것입니까?”
 
라고 하늘에 고하였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으로부터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이 뜰에 가득히 날리며,
우레와 벼락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사람을 놀라게 하니,
형리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자백했으므로 시비를 가려 밝혀 줄 수가 없었다.
 
 
화악은 북한산을 말하고, 형장(刑杖)은 죄인을 치는 몽둥이를 말하는데요,
생원 이승언은 정말 억울하게 형장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476(성종 7)에 조정에서 어우동의 남편이었던
태강수 이동의 고신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여기(女妓)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朴氏)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는데, 한편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동의 고신(告身)을 거두게 하였다.
 
 
고신(告身)은 직첩(職牒)이라고도 하는데, 벼슬 임명장입니다.
그리고 <종부시>는 종실을 관리하는 기관인데요,
 
종부시에서 왕족인 이동이 관비인 연경비에게 홀려서 어을우동을 버렸다고 임금께 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단서가 무엇일까요?
종부시의 보고는 이동이 관비 연경비를 첩으로 들였고, 첩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아내 박씨, 즉 어을우동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쫓았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데요.
 
사실이 아니라면 임금 종친에 관한 일을 이렇듯 강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많이 순화시키고 죄를 깎아서 고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일설에는 이동이 어을우동을 내쫓기 위해 일부러 은장(銀匠)을 집에 불러들이고는
매일 첩에게 가서 놀았다고 하는데요,
바로 종부시의 이 사찰내용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을우동은 사실은 문란한 여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전남편 이동의 덫에 걸려들어 쫓겨난 것이 억울해서,
그 복수심에 일부러 이동과 친한 사람들과 간통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앞의 용재총화에서,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히긴 했으나
반가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었으므로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라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길에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반가의 딸로서 극형을 받아서가 아니라
어을우동의 그 억하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눈물을 흘렸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성종 19620,
 
 
이보다 앞서 음죽 사람 고() 군수 박윤창의 처 정씨가 도둑에게 살해되었는데,
경차관 이의형(李義亨)이 가서 추국(推鞫)하니,
그 아들 박성근(朴成根)의 소행이었다.
 
 
라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있네요.
박윤창은 어을우동의 친정아버지이죠?
같은 해 822일 기사를 보니 <박성근은 어을우동의 오라비다>라고 기록돼 있네요.
 
 
그의 어미 정씨도 또한 크게 음행함이 있어서
박성근이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미가 잠잘 때에 발이 넷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였더니, 정씨가 이 연유로 하여 미워하고,
밤이 되면 반드시 박성근을 상자 속에 가두었으며,
의복이나 음식은 비복의 소생과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장성함에 이르러 또한 토지와 노비를 적게 주어서 박성근이 이것을 원망하더니,
종형(從兄)집의 종 내은산(內隱山), 그리고 내은동(內隱同)과 공모하고는
정씨가 그의 조카 정소(鄭韶)의 집에 가 있을 때
드디어 정씨의 종 왕석(往石)과 내은동, 내은산 등이 강도로 위장하고 가서 죽였다.
 
박성근이 정소와 함께 공모했다고 부는 바람에 (정소가) 공초(供招)를 받게 됐는데, 장신(杖訊) 중 옥에서 죽었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박성근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박성근이 죽인 엄마 정씨는 이때
번좌(番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었네요.
 
바로 어우동의 딸입니다.
어우동이 교형에 처해졌으므로 어우동의 딸은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던 거죠.
 
 
 
 
조선 중기 명종 연간에 활동한 문인 권응인(權應仁)이 지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이런 글이 있네요.
 
 
옛날 어떤 부인의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는 다음과 같다.
 
백마대 비었는지 몇 해가 지났는고(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채로 숱한 세월 지났구나(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이와 같이 침묵하지 않는다면(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千古興亡問可知)
 
어떤 사람은 어우동(於宇同)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음란한 여자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
 
(참고: 한국고전종합BD)
 
 
 
부여를 회고하는 시입니다.
 
 
 
참고: (한국고전종합DB,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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