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張桂香)
<<음식디미방>>을 아시는지요.
음식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래된 조리서입니다.
오늘은 그 저자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 장계향 선생을 만나볼 텐데요, 곧을 정 자(貞) 정부인은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나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적처(嫡妻), 그리고 종2품인 가정대부(嘉靖大夫)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적처를 봉작하고 내리는 작호(爵號)입니다.
외명부(外命婦), 외명부라는 건 특수층 여인, 그리고 봉작을 받은 사대부 여인을 칭하는 말인데요, 외명부에는 정부인 위로 공주와 옹주, 부부인, 정경부인, 봉보부인, 군부인, 군주, 현부인 등이 있고, 아래로는 현주, 신부인, 숙부인, 신인, 숙인, 혜인, 영인, 온인, 공인, 순인, 의인, 안인, 단인, 유인 등이 있었습니다.
장계향 선생이 정부인이었다면, 정헌대부나 자헌대부의 적처였다는 뜻인데요, 그러나 정부인 장계향은 남편이 벼슬길에 나아간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부인에 봉해질 수 있었던 걸까요? 그것은 훌륭한 아들을 둔 덕분이었습니다.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은 남편이 아닌 아들이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봉해졌기에 나라로부터 정부인 봉작이 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아들을 두었기에 나라에서 그 적처가 아닌 어머니에게 정부인 작호를 내린 것일까요?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죠.
선조 시대에 일어난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죠? 이 전쟁은 1958년에 끝나게 되는데요, 이순신 장군의 전사와 함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납니다. 공교롭게도 장계향은 전쟁이 끝나던 이 해에 세상에 태어납니다.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경당고택(敬堂古宅)에서 말이지요.
경당(敬堂)은 장흥효(張興孝)의 호인데요, 그렇다면 경당고택은 장흥효의 집이겠죠? 그렇습니다. 바로 경당 장흥효가 장계향의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는 첨지 권사온(權思溫)의 딸 안동권씨이구요.
장흥효는 1564년(명종 19년)에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는데요, 금계리는 경당고택이 있는 성곡리와 아주 가깝습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종택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김성일과 같은 동네에 살았으므로 김성일 문하에서 수학하고,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습니다.
류승룡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지휘하여 왜적을 무찌른 일등공신이고, 김성일은 왜국에 통신부사로 다녀온 후 당시의 서인(西人)인 통신정사 황윤길과 반대로 왜침은 없을 거라고 임금께 고하였다가 역사의 죄인으로 남은 분이며, 정구는 심학과 예학을 오래 연구하여 심학과 예학의 종장으로 숭상 받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김성일, 류성룡, 정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흥효는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겠죠.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한 장흥효는 역학(易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하는데요, 소옹(邵雍)의 원회운세(元會運世)에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더하여 새로운 역학 원리를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완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역학의 오류를 발견하고 해결방법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낸 학자였습니다.
장흥효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며 경당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는데요, 장계향은 여자임에도 아버지의 서당에서 학문을 익혀서 웬만한 선비들도 알지 못한다는 원회운세의 수(數)를 훤히 헤아렸다고 합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태극도설의 이치를 깨우쳤고, 일찍 글자를 깨우쳐 한시도 즐겨 썼다고 합니다.
장계향이 지었다는 한시가 전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경신음(敬身吟)」이네요. ‘경신’은 ‘몸에 대한 경근(敬謹)’을 뜻하는 말로, 몸을 공경하고 삼가는 것, 즉 외(畏: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는 뜻)라고 할 수 있겠지요.
퇴계와 남명의 제자로서 선조 연간에 활동한 학자 김우옹은 육잠 중 「경신의 잠」에서,
경신이란 ‘일심(一心)의 지표로 일신(一身)의 대응을 다스리는 것으로, 마음가짐을 바로 하여 몸가짐을 삼가는 것’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경신음」은 ‘경신을 다짐하다, 읊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네요.
身是父母身-몸은 곧 부모님인 것
敢不敬此身-감히 이 몸 경신하지 않을 수 있으리.
此身如可辱-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乃是辱親身-곧 부모님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계향이 어릴 때 지은 다른 시 「성인음(聖人吟)」도 있지만 생략하고요, 다음으로 어느 정도 성장해서 지은 「학발(鶴髮)」이라는 한시를 살펴보겠습니다. ‘학발’은 학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으로, 예전엔 백발노인을 표현할 때 쓰던 말입니다.
鶴髮臥病(백발 할머니 병들어 누웠네)
行子萬里(아들은 떠나 만 리 밖에 있고)
行子萬里(아들은 떠나 만 리 밖에 있고)
曷月歸矣(어느 달에나 돌아올꼬)
鶴髮抱病(백발의 할머니는 병들어 누웠고)
西山日迫(서산의 해는 빨리도 지는데)
祝手于天(손 모아 하늘에 빌고 또 비는구나)
天何漠漠(은하는 막막하기만 한가)
鶴髮扶病(백발의 할머니 병을 무릅쓰시기에)
或起或陪(혹은 일으켜 앉히고 혹은 부축해드리는데)
今尙如斯(지금 더욱 이러한데)
絶据何若(의지할 곳 없으니 어찌할까나)
이 시 「학발」은 장계향이 초서로 지은 시라고 하는데요, 이웃을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이 읽힙니다.
여기서 잠깐 장계향의 초서 실력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습니다. 정구와 류성룡 문하에서 수학한 서예가이자 학자인 정윤목이라는 분이 계셨는데요, 그분이 장계향이 초서로 쓴 적벽부체(赤壁賦體)를 보고 깜짝 놀라며,
“필체가 호방하고 굳세어 우리나라 사람의 서법과는 다르니, 중국인의 필적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장계향은 서예에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위의 시 학발은 아랫마을 할머니가 마흔 후반에 어렵게 얻은 독자가 군역으로 징집되자 아들 걱정에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떡을 들고 할머니 집을 찾아가 병수발을 들었고, 그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장계향은 이렇듯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아는 마음씨 고운 소녀였습니다.
1612년은 선조의 시대에서 광해군 시대로 넘어간 광해군 4년이었는데요, 장계향의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입니다. 이 해에 경당서당에는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장흥효 문하의 이시명(李時明)이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마시라고 하면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를 일컫는 말인데요, 사마양시에 다 합격했다는 것은 생원과 진사가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시험의 1차 관문을 통과하였고, 그것도 양시에 다 합격했으니 대단한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계향의 가족들에겐 매우 슬픈 해이기도 했습니다. 장계향의 어머니가 중병으로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장계향은 3년간 정안수로 기도하고 극진히 간병했고,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어머니가 병을 털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즈음, 그러니까 장계향의 어머니가 병을 털고 일어났을 즈음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던 이시명이 돌연 경당서당으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매진하게 됩니다. 갑자기 왜일까요?
이때는 북인 중에서도 대북파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인데요, 그런데 남인 숙청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다름 아닌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정인홍(鄭仁弘)이었습니다.
정인홍은 의병장으로 유명하지만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북인 영수로 떠올라서 퇴계학파(退溪學派)를 억압하고 남명 조식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추진하는데요,
문묘종사라는 것은 높은 학덕을 갖춘 현인(賢人)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등에 모시고 배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는 퇴계의 제자이면서 남명의 제자이기도 한 정구에 의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의 문묘종사를 추진했고, 그래서 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인홍은 그 중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는 터무니없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대신 자신의 스승인 조식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당연히 퇴계학파가 반발하면서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남명학파는 당시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사림의 두 축을 이루고 있었는데요, 퇴계학파는 인(仁)을 강조하는 학문을 추구했고, 남명학파는 의(義)를 강조하는 학문을 추구했습니다. 남명학파에서 배출한 가장 성공한 인물은 선조임금의 측근이었던 김우옹(金宇顒)이었습니다.
김우옹은 성균관대학 설립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창숙(金昌淑) 선생의 선조이신 분으로, 두 분이 태어난 시기는 3백39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태어난 집은 같은 집이었다고 합니다. 김창숙 선생 후손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김우옹은 남명학파이면서 퇴계학파였어요. 남명 문하에서 수학한 후 퇴계 문하로 옮겨가서 또 수학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니까요.
남명은 살아생전에 김우옹과 정인홍을 특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김우옹도 권력을 잡은 정인홍의 배척을 받습니다. 정인홍이 퇴계학파를 매우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인홍은 김우옹에게 퇴계학파냐, 남명학파냐 묻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김우옹은 남명과 퇴계 두 분 다 스승인데 한 스승만 고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화를 내고 정인홍과 절교를 선언해버립니다. 그만큼 정인홍의 퇴계학파에 대한 시기가 강했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런 정인홍이 권부에 올랐으니 퇴계학파가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이시명도 퇴계학파의 정맥을 계승한 장흥효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정인홍 일파의 강력한 견제로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시명은 당시 혼인을 한 몸으로,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사안(金思安)이었습니다. 김사안과의 사이에 아들 이상일을 두고 있었는데요, 이 즈음에 부인 김사안이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이시명은 크게 상심하여 과거의 뜻을 접고 경당서당으로 가서 학문 연구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시명의 형 이시청은 이시명에게 과거를 보라고 간곡히 애원했습니다. 자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 학문을 닦지 못했지만 동생은 건강하고 학문에도 뛰어나니 반드시 입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1년 후, 이시명은 건강치 못한 이시청의 간청에 마지못해 과것길에 오릅니다. 형 이시청이 동행을 하는데요, 그러나 결과는 이시명의 예상대로 낙방이었고, 실망하여 돌아오던 길에 안동 근처까지 와서 원래 병약하던 형 이시청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제가 왜 이시명에 대해 이렇듯 상세히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예상하고 계실 듯한데요, 이분이 바로 장계향의 미래 남편이 될 사람입니다.
이시명의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입니다. 아버지는 의령현감 벼슬을 지낸 이함(李涵)입니다.
장흥효는 연이은 불운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수제자 이시명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 장계향을 이시명에게 시집보내서 천재학자가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막아보자고 말입니다. 아무리 제자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무남독녀 외동딸 처녀를 아이까지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보내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장계향은 아버지 뜻에 따라 아이 딸린 홀아비 이시명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사시던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를 두고 말이지요.
장계향이 석계 이시명에게 시집갔을 때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열아홉 새댁은 그런데 이시명의 전처 김사안에게서 난 일곱 살짜리 아들 이상일을 친엄마보다 더 정성스럽게 돌봤다고 하는데요, 워낙 정성을 쏟았기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새엄마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장계향은 이시명과 혼인한 후 6남2녀를 낳게 되는데요, 이상일을 합쳐서 7남2녀를 키웁니다. 그 아들 일곱 명이 모두 훌륭한 학자로 자라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칠현자(七賢子)라 불렀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옛날의 성인과 현인의 말씀은 반드시 존중하여 본받아야만 한다.’라고 여기셨는데, 매양 글은 글대로 읽고 사람은 사람대로 행동하는 폐단을 탄식하신 것이다.>
아들 이현일(李玄逸)은 갈암집 「선비 증정부인 장씨 행실기」에서 이렇게 어머니를 회상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장계향을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덕행으로 이름이 높은 여자를 여중군자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장계향은 어떻게, 어떤 덕행이 있기에 여중군자라는 칭송을 받게 것일까요?
이시명은 안동의 경당서당에서 학문을 익혔지만 집은 영해군, 영해군은 지금의 영덕군이죠, 영해군에 있었습니다. 안동으로 유학을 온 것이지요.
장계향은 아마도 영해에 있는 시댁으로 들어가서 시집살이를 했던 듯합니다. 그런데 장계향의 시댁은 제법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시아버지 이함이 현령 벼슬을 지냈으니 중소지주 정도는 되었겠지요. 장계향은 시집을 가서 보니 시댁에 일은 없는데 노비들은 많았습니다. 장계향은 시아버지와 의논하고 노는 노비를 부려서 길쌈을 크게 벌입니다. 그렇게 생산된 많은 옷감을 일부는 양식으로 바꾸고 일부는 옷으로 만들어서 굶주린 이웃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소문이 나자 사방의 걸인들이 모두 이함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들 이현일(李玄逸)이 쓴 갈암집 「선비 증정부인 장씨 행실기」에는 또 이런 내용도 있네요.
<어린 여종을 돌봐 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해서 그들에게 질병이 생기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먹여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했다.>
장계향은 의약을 공부해서 의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온 걸인들에게 양식과 옷을 베풀 뿐 아니라 병든 자들을 찾아서 치료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갈암집 「선비 증정부인 장씨 행실기」에는 또 이런 내용도 있네요.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가난과 곤궁을 핑계로 못 본 척 하는 일 없었다. 몰래 남에게 음식을 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두가 그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 받기를 빌었고, 죽어서도 반드시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장계향의 덕행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일생동안 쭉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사회봉사에도 큰 역할을 했기에 여중군자로 칭송받게 된 것 아닐까요?
자, 그런데 말이죠, 장계향이 이시명과 혼인하고 약 10년 뒤인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납니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옹립한 사건인데요, 이렇게 옹립된 임금이 인조입니다.
하늘이 바뀌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도 참형되었으니 퇴계학파에 대한 탄압도 끝난 것이지요. 이시명은 다시 과거를 보기 위해 향시별과에 응시해서 수석을 차지합니다. 이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으니 열심히 과거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인지 좀처럼 급제하지 못했는데요, 그러던 중 부친상을 당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게 됩니다. 3년상이 끝난 후에야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지만 그때도 어머니가 병들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 1636년의 일이니 장계향도 어느 새 서른아홉의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 이시명은 화의론(和議論)에 극렬히 반대하며 뜻을 같이하는 유생들과 함께 척화소(斥和疏)를 올리는데요, 척화소란, 화친을 배척하는 상소문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인조임금이 남한산성 아래의 삼전도(三田渡) 나루로 내려가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로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이 있게 되지요. 삼배구고두례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청나라 식 항복례입니다. 이때 많은 선비들이 분개하여 세상을 등지고 은둔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이시명 또한 가족을 거느리고 영해 북쪽 한밭골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은사(隱士)가 됩니다. 물론 과거를 포기하고 말이죠.
그런데 2년 후, 은둔한 선비 이시명을 경상도관찰사가 모함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모함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시명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무고임이 밝혀져 풀려납니다. 세상이 더욱 싫어진 이시명은 가족을 거느리고 더 깊은 산골로 숨어드는데요, 바로 영양 석보촌, 언덕위의 마을이라는 뜻의 두들마을입니다.
(바로 이곳 두들마을로 말이죠.)
(두들마을에 있는 석계고택(石溪古宅)인데요, 석계는 이시명의 호입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본 석계고택 본체입니다.
이시명과 장계향이 이곳 두들마을로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은 1641년에 극심한 흉년이 듭니다. 역병이 돌고 백성들은 기근에 허덕이게 되죠. 굶주린 빈민들은 장계향이 인심 후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장계향도 당시엔 그리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베풀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장계향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그들을 이끌고 산으로 가서 도토리를 줍습니다. 그것으로 묵을 쑤어서 그들을 구휼합니다.
그런데 그때 집에 불이 나서 전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친정을 찾았던 두 딸이 급병으로 죽게 됩니다. 장계향에게는 시련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냅니다.
13여년 후, 이시명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영양 수비로 이사하고, 그곳에 영산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합니다.
1672년(현종 13년)이 되었습니다. 장계향이 낳은 큰아들인 이휘일도 어느 듯 쉰세 살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큰아들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장계향의 몸에서 난 둘째아들 이현일의 처 무안박씨도 세상을 떠납니다. 뿐만 아니라 막내아들인 이운일마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크나큰 불행이 또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이현일은 갈암집 「선비 증정부인 장씨 행실기」에서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선친(이시명)의 둘째 아들 휘일은 부인(장계향)에게는 큰아들인 데다 행실이 어질어서 부인이 특히 사랑하였고, 딸 둘과 막내 운일도 모두 평생 염려하였는데, 모두 불행히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인이 필시 슬픔으로 몸을 해칠 것이라고 하였으나, 감정을 단속하고 슬픔을 억제하여 지나치게 상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고서 말하기를, “나는 애통하고 절박하다 하여 부모님이 남겨 주신 몸을 해치지 않는다.” 하였다.>
이제 83세가 된 이시명은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안동 대명동(大明洞), 지금의 풍산읍 수곡리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2년 후 세상을 저버립니다.
큰 슬픔 뒤에 큰 기쁨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3년 후엔 경사가 찾아옵니다. 아들 이현일이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악원주부에 제수되고 첫 벼슬길에 오릅니다.
이현일 또한 아버지처럼 외할아버지 장흥효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일어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러자 남인은 초야의 현인 이현일을 학행으로 천거하게 되고, 임금은 특별히 사직서참봉에 제수합니다. 그러나 이현일은 아버지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는 중이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습니다. 이듬해에 상기가 끝나자 임금은 다시 이현일을 장악원주부에 제수했던 것입니다. 이현일은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장악원주부에 부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장계향이 지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라는 책은 어떤 책일까요?
음식디미방은 책 제목인데요, ‘디미’라는 말은 음식을 맛본다는 궁중말인 ‘지미(知味)’의 옛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음식을 맛내는 방법’을 소개한 조리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책은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요, 궁체 필사본이지만 장계향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저술연대는 알 수 없고요, 대략 저술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당부의 말이 권말에 첨부되어 있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책을 이리도 눈이 어두운 중에 간신히 썼으니 이러한 뜻을 알고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말라.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지지 않게 하라.”
노안이 심하다면 만년에 저술하였겠지요?
이 책의 권두서명은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고 적혀 있지만 표제명은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입니다. 아마도 후손들이 덧붙여놓은 것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쓴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데요, 이 책에는 면병류(면과 떡) 18종, 어육류 74종, 주류와 초류(식초) 54종 등 총 146종의 음식 조리법이 소개돼 있습니다.
면병류를 보면 메밀국수, 쇠면, 착면, 착면법, 별착면법, 난면, 만두, 상화, 증편, 밤설기, 잡과편, 석이편, 섭산삼 등등이 있고, 조과류에는 약과, 연약과, 중배끼, 빙사과, 강정, 다식, 앵도편 등이 있으며, 어육류에는 어전법, 어만두, 숭어만두, 청어염장법, 대구껍질누르미, 생선말리는 법, 붕어찜, 연어알, 생복 간수하는 법 등등이 있고, 채소류에는 쑥탕과 동아누르미, 동아적과 동아선을 만드는 법, 숭어어전을 만드는 법 등등 다양하게 소개돼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특히 ‘비웃’을 이용해 말린 생선탕을 만드는 조리법에 관심이 갔는데요, 비웃이라는 것은 청어를 말린 것입니다. 말린 청어, 하면 과매기가 떠오르는데요, 과매기처럼 먹지 않고 생선탕으로 끓여서 먹었던 모양입니다. 비웃은 비유어(肥儒漁)라고도 하는데요, 비유어는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청어는 등푸른 생선이죠? 등푸른 생선이 머리를 좋게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옛날 선비들이 비웃을 먹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장계향 선생은 남편 이시명이 세상을 떠난 후 장자 이상일을 따라 영해 벽수촌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소생이 아님에도 친아들보다 더 정성을 쏟아서 기른 그 아들 이상일 말입니다.
1677년은 장계향의 나이 여든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상일은 어머니가 병이 들자 어머니를 위해서 두들마을로 돌아왔는데요, 그런데 이상일이 이듬해에 68세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장계향 선생도 이듬해인 1680년 7월 7일 8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다면 벼슬길에 나아갔던 이현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현일은 그 후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이조참의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합니다.
앞에서 제가 장계향은 정부인에 봉해졌다고 말씀드렸지요? 바로 이 아들, 이현일의 공업이 높아서 장계향이 정부인에 봉작되었던 것입니다. 장계향이 세상을 떠날 당시의 품계는 의인(宜人)이었는데요, 사후 9년이 지난 1689년(숙종 15년) 8월 19일에 정부인에 추증됩니다. 그 교지가 현전하고 있습니다.
이현일의 기록을 보니 1689년엔 예조참판 겸 극자좨주,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에 제수되었더군요.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숙종 15년 7월 22일 기사를 한 번 볼까요?
<목래선(來善) 등이 말했다.
(원자)보양관(輔養官)을 이제 뽑아 정하였는데, 고사(故事)에 의하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이라야 이 선임(選任)에 해당하니, 이관징(李觀徵)과 민암(閔黯)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 나머지 한 자리는 이현일(李玄逸)이 마땅한데,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상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현일을 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다. 진실로 보양관의 선임에 합당하니, 가선(嘉善)으로 올릴 것 같으면 제수할 수 있다. 어찌 단계를 뛰어넘어 특진시키는 것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목래선(睦來善)은 당시 좌의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현일은 특별히 가자되어 가선대부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현일의 적처가 아닌 그 어머니 장계향에게 정부인 작호가 내려집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현일이 상처 후 이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저 나름대로 짐작해보았습니다.
이현일은 원자보양관에 제수되었습니다. 원자보양관이라면, 후에 원자가 세자에 봉해지고 임금이 되었을 경우 출세가 보장되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이현일은 자신의 부덕을 내세워 여러 번 겸양하고 끝내 사직을 표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사헌부 장관인 종2품 대사헌에 제수하고 보양관을 겸하게 하며 붙잡습니다. 이현일은 그러나 끝내 직을 사양하고 시골로 내려갑니다.
임금은 이현일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다시 부르지요. 이현일은 임금의 소환에 응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마지못해 상경해서 사은하고 직에 임하지만 직을 수행할 역량이 되지 않는다며 낙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상소로 청했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윤허하지 않습니다. 이현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번 상소를 올린 후에야 어렵게 어렵게 윤허를 받아내고 다시 낙향합니다.
그렇지만 임금은 이현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골로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사헌에 제수하고 또 부릅니다. 이현일은 한사코 사양하며 부임하지 않지만 임금이 사관을 보내 어명으로 소환하니 어쩔 수 없이 상경하여 본직에 부임하게 됩니다.
이현일은 왜 이렇듯 높은 직에 부담을 갖고 한사코 사양했던 것일까요? 그 후 이현일의 신상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그 이유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조사기(趙嗣基)라는 인물이 송시열을 공박했다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 있었는데요, 선왕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다시 잡혀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현일은 조사기가 이미 유배 중이므로 용서해야 한다고 임금께 청했는데요, 그 일로 탄핵을 받고 함경도 흥원현으로 유배되었고,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됐다가 호남 광양으로 다시 이배되는 등 5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현일이 임금의 총애를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은 없었겠지요.
이현일은 이곳저곳으로 이배되며 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 25년인 1699년 풀려났고, 안동 임하현으로 내려가 살며 후학양성에만 매진했습니다.
참고문헌: 갈암집(이현일 저, 홍기은 역, 한국고전DB), 「사람이 되라, 손자에게 보낸 퇴계의 편지」(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 「성인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철학자 장계향」(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여중군자 장계향과 운악 이함의 사회적 실천」(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음식디미방에 수록된 전통음식의 향약성에 관한 고찰」(경희대학교 고리과학과 신민자, 경희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이영순, 경주대학교 관광학부 최수근), 「음식디미방 저자 실명 ‘장계향(張桂香)’의 고증과 의의」(배영동,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