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인의 난을 토평한 정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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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그의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통해 현도성(玄菟省)과 만하성(滿河省), 즉 함경도, 일명 북도(北道)의 역사를 소개하며 만하성 육진은 본래 북옥저(北沃沮)였는데, 오랜 세월 말갈(靺鞨: 속말말갈)이 점거해 있었고, 발해(渤海)가 번성할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삼았으며, 발해가 망한 후 야인이 차지했으나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하고 다스려 우리 지배하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그 후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 <이징옥(李澄玉)의 난>, 그리고 <국경인(鞠景仁)의 난> 등을 거론합니다.
정약용은 <국경인의 난> 때 <번신(藩臣)>, 즉 국경지역 신하와 수신(帥臣), 즉 병사와 절도사를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라고 했는데요,
<국경인의 난>이 임진왜란 때 일어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범할 때에 맞춰서 일어났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국경인은 죄를 지어 회령에 유배되었으나 회령부 아전이 되었고, 많은 재물을 모았는데요, 당시에는 아전으로서 부를 축적한 사람이 국경인 외에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지방 아전에게 지급하던 녹봉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지방 아전은 녹봉이 지급되지 않자 알아서 자기 몫을 챙겨야 했고, 그러다 보니 비리를 저질러 부를 축적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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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인의 난>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니,
<양사, 즉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명으로 논죄의 글을 올랐다.>
라고 하면서 김귀영(金貴榮)을 논죄했는데요,
<귀영이 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명을 받들어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모시고 북도(北道: 함경도)로 들어갔는데, 회령(會寧)에 이르렀을 때 지역민 국경인 등이 모반하여 왕자와 대신들을 붙잡았고, 성(城)과 함께 적에 항복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귀영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병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대제학(大提學) 등을 두루 역임한 후 1581년(선조 14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1583년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1589년(선조 22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땐 영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습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수행하여 회령부에 갔다가 <국경인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두 왕자와 함께 반란군에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으로 향하던 당시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이 함경도 코앞에 들이닥쳐 있어서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요, 두 왕자는 왜 그렇듯 위험한 모험을 강행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광해군이 세자에 갓 봉해진 것과 연관 지어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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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4월 28일 기사를 보겠습니다.
<충주(탄금대)에서의 패전 보고가 올라오자 주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入對)한 자리에서 파천(播遷)의 뜻을 밝혔다.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종묘와 원릉(園陵)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京城)을 고수하며 외국의 원군을 기다려야합니다."
라고 했고, 우승지 신잡(申磼)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청에 따르지 않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은 집에 80노모가 계시므로 종묘문 밖에서 자결하지 절대 전하의 뒤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으며, 수찬 박동현(朴東賢)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한 번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전하의 가마를 멘 가마꾼도 길모퉁이에 가마를 버리고 달아날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목 놓아 통곡하니 주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양력 6월 7일은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전투에서 패한 날인데요, 그 패전 소식이 곧바로 대궐에 전해졌습니다. 적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선조임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신들을 불러서 파천을 해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승지 신잡은 자결 의지를 드러내며 파천에 강력한 반대를 합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반대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다만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만은 전례가 없지 않다는 말로 우회적으로 신잡을 설득합니다.
파천에 가장 강력히 반대를 한 우승지 신잡은 바로 신립장군의 형입니다. 그런데 신잡은 몇 시간 후,
"사람들의 염려와 두려움이 크니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하고 전쟁의 위기에 세자부터 세워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간합니다. 임금은 신잡이 파천에 워낙 강력히 반대하므로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물리치기에는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든지 옷을 갈아입겠다며 내전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신잡은 지금 예절 따위에 얽매일 때가 아니라면서 당장 대신들과 세자 책봉을 의논하라고 설득합니다. 선조임금은 신잡의 압력 비슷한 설득에 마지못해 대신들을 불러들이라고 명하는데요, 신잡은 광해군을 강력히 지지했고, 따라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면 파천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암시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신잡은 광해군이 세자로 정해진 후 더는 파천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고 빈청(賓廳)에 대기 중이던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뭔가를 눈치 챈 이산해와 류성룡은 어탑(御榻)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관들이 권해서 마지못해 임금께 다가가자 임금은 세자로 누가 적임인지 묻습니다. 그러나 이산해와 류성룡은 성상께서 결정할 일이라며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의 침묵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당시는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다가 선조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를 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누군가를 말했다가는 정철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흘러서 밤이 깊어졌습니다. 이산해는 슬쩍 자리에서 물러가려 하는데요, 그것을 본 신잡은 오늘 기필코 결정을 내려야 물러갈 수 있다며 붙잡고 늘어집니다.
선조임금은 무조건 피난을 가겠다는 생각이었고, 두 대신은 말이 없고……, 그러자 신잡이 원하는 광해군을 세자에 세우겠다고 말합니다.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그를 세자로 세우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그런데 반대해줄 줄 알았던 대신들이 얼른 동의를 합니다.
이에 신잡은 즉시 광해군의 궁인 이현궁(梨峴宮)에 군사를 보내 호위하고, 그래서 광해군은 이튿날 세자에 책봉됩니다. 신잡이 세자책봉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광해군을 세자에 세우고 그 이튿날인 4월 30일 새벽에 선조임금은 궁궐을 떠나 피난길에 오릅니다. 임금과 관료들이 나라 지킬 생각은 않고 피난길에 오르자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비난이 쏟아졌는데요,
파천 얘기는 여기서 끝내고 임해군과 순화군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갔을 당시에는 광해군이 갓 세자에 책봉되었고, 세자위에 오르자마자 피난길에 올랐으므로 아직 그 위가 튼실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두 왕자 일행은 그런데 함경도에서 왜적에 쫓기게 되고, 경성(鏡城)으로 달아났으나 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摩天嶺) 전투에서 패하여 경성 또한 안심할 수 없게 되자 회령으로 가게 됐던 것입니다.
임해군은 서자이기는 하지만 선조의 맏아들이었죠. 그렇기에 광해군에게 밀려 세자에 책봉되지는 못했어도 그 세력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후일, 1608년에 일부 대신과 명나라에서 임해군을 왕으로 밀게 되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 함경도로 갔다고 하는데요, 남쪽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가 삼도근왕병을 일으켜 권율 장군을 중군장에 세우고 왜적과 싸우고 있었죠. 임해군은 서북면과 동북면에서도 그와 같은 근왕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다면 큰 공을 이루어 광해군에게 넘어간 세자위를 빼앗을 수 있다고 계산했을지 모릅니다. 만일 임해군과 순화군의 그 구상이 성공했다면 광해군이 세자위를 지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임해군과 순화군은 때마침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 무리에 사로잡혀서 왜적에게 넘겨지고, 오랫동안 포로로 잡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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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했다시피 국경인은 회령부 아전이었습니다. 그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또한 회령부 아전이었는데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적이 함경도를 향해 쳐들어오자 국경인과 국세필은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를 끌어들이고 이언우(李彦祐), 함인수(咸麟壽), 정석수(鄭石壽)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갑옷기병 5천을 모으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먼저 회령부성을 점령하고는 때마침 온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그들 왕자를 수행하던 다섯 대신을 사로잡아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깁니다. 그런 다음엔 왜적과 함께 경성(鏡城), 길주성(吉州城), 명천성 등을 쳐서 함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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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함경도평사(咸鏡道評事), 일명 북평사라고도 하는데요, 함경도평사 정문부(鄭文孚)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평사라는 벼슬은 병마평사(兵馬評事)의 약칭으로, 병마절도사 막하에서 사무를 보는 일종의 보좌관입니다. 당시 함경도는 남쪽을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고 북쪽은 북계병마절도사가 관할했는데요, 북평사 정문부는 학식이 상당해서 북계에 부임한 후 낮엔 업무를 보고 밤엔 교생들을 모아 무료로 학문을 강학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도와서 민심을 크게 얻었습니다.
그런데 정문부 또한 마천령 전투의 패배 후 북병영의 군사가 흩어지자 도망치다가 국경인 무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정문부가 회령부성으로 잡혀오자 회령부에 사는 정문부 제자들이 반란군 눈을 피해 스승을 구출해내고 경성 해변에 사는 지달원(池達源)의 집으로 데려가서 숨겨주는데요, 지달원 또한 정문부의 제자였습니다. 정문부의 영향력이 북계 전역에 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문부는 지달원의 집에 숨어 지내며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달원과 최배천(崔配天) 등의 제자들을 시켜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했습니다. 경성에서 전(前)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왔고, 종성의병장 김사주(金嗣朱)와 경성의병장 오박(吳璞) 등도 달려왔습니다. 또 북병영 예하의 진인 고령진(高嶺鎭)의 주장인 첨절제사(僉節制使: 진군의 주장) 류경천(柳擎天)도 북병영의 흩어졌던 군사를 모아서 정문부 의진에 합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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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의진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나자 왜적에 쫓겨 달아나 숨어 있던 종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鏡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군관 오대남(吳大男) 등도 관병을 거느리고 합류했습니다. 그래서 정문부 의진은 군사의 규모가 5천 가량이 되었습니다.
부사는 정3품과 종3품이고, 정문부 의병장은 정6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문부는 부사 중 가장 선임인 종성부사 정현룡에게 지휘권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의병의 규모가 관병에 비해 월등한데다 모두들 정문부를 믿고 몰려들었으므로 정현룡은 사양합니다. 그래서 정문부가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총지휘하게 됩니다.
정문부는 의진을 짜고서 경성을 쳐서 왜적과 반적을 크게 무찌르고 성을 회복했습니다. 경성은 청진과 어랑군 사이에 있는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적이 점거한 길주성과 회령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적과 반란군은 경성을 빼앗김으로써 경성 이북지역의 왜적 및 반란군과 완전히 단절되어버렸는데요, 그런데도 왜적과 반란군은 경성의 정문부 의진과 싸워 성을 되찾으려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정문부 의진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정문부는 또 회령(會寧)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으로 하여금 국경인을 유인해 그 목을 베게 한 후 고참역으로 쳐들어가 왜적을 무찔렀으며, 명천성을 쳐서 반적 정말수를 처형했고, 길주성의 적을 유인해서 장덕산(長德山)에 몰아넣고 포위했습니다. 그날 밤 눈이 내리고 추위가 심했습니다. 정문부는 적의 몸이 모두 얼어서 꼼짝할 수 없는 새벽에 군사를 휘몰아 적을 공격했고, 1천여 명을 살획하고 13명의 반란 주동자 목을 베었습니다. 달아난 적들이 길주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닫아걸고 버텼으므로 정문부는 길주성을 포위하고 고사작전에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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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조정에서 윤탁연(尹卓然)을 함경도순찰사 겸 관찰사로 임명해 보냅니다. 윤탁연은 김귀영과 함께 임해군과 순화군을 수행하다가 반란군에 사로잡혀 왜적에 넘겨졌고, 얼마 뒤 왜적이 풀어주어서 돌아온 인물인데요, 조정에서 그를 순찰사에 임명한 것은 아직도 왜적에 사로잡혀 있는 두 왕자 때문이었습니다. 두 왕자를 구출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보낸 것이지요.
그런데 순찰사 윤탁연은 경성과 명천성 탈환에 공을 세운 논공명부를 작성하면서 정문부의 공을 깎아내려서 반적 수괴를 죽인 공만 있고 나머지 전공은 종성부사 정현룡이 세운 것으로 하여 비변사에 올렸습니다. 일개 막관(幕官)인 평사가 의병장이랍시고 상관인 부사들을 지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당시의 사관들은 그 자신이 정문부의 공을 시기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윤탁연이 전공을 조작해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정현룡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오르지만 정문부는 겨우 길주부사(吉州府使)에 제수되었습니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은 당연히 정문부가 병마절도사가 될 줄 알다가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탁연은 정문부의 공만 깎아내린 것이 아니라 의병들 공도 관병들 아래로 하였습니다. 의병들이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자 정문부는 분개했고, 의병을 해산하려 했습니다. 의병들과 함경도 유생들 또한 윤탁연의 처사가 부당하다며 상소했고, 조정에서 정문부와 윤탁연의 화해를 주선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다만 정문부는 의병해산을 취소하고 다시 의진을 정비하여 토왜와 반적 소탕을 이어갔는데요, 길주성의 왜적 및 반적과 싸워 이기고 성을 탈환했으며, 반란군을 흩어버리고 왜적을 남쪽으로 멀리 밀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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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는 함경도 북쪽에 남아 있는 왜적과 계속 싸웠습니다. 그러던 중 왜적을 쫓아 함흥(咸興)까지 이르게 되었는데요, 정문부는 왜적이 함흥 땅으로 들어서자 더 추격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함흥은 함경도 감영이 있는 곳이므로 윤탁연 관할이었던 거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윤탁연은 정문부를 잡아들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정문부는 관찰사가 적을 잡으려 하지 않으니 의병장도 놓아 보낸 것이라 하며 체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윤탁연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고의로 적을 놓아 보낸 정문부를 벌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윤탁연은 여러 번 정문부를 군법으로 죽이려 하였으며, 의병장 자리에서 내쫓거나 매로 고문하였으므로 여러 번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문부는 윤탁연에게 굴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서도 윤탁연의 말을 믿지 않아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윤탁연은 정문부 부하가 수레에 수급을 싣고 함흥 근처를 지날 때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는데요, 윤탁연은 1594년(선조 27년)에 임지에서 죽었고, 정문부는 그 후로도 계속 싸워 함경도를 완전히 평정하였습니다.
정문부의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농포(農圃)인데요, 1565년(명종 20년)에 한성(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정문부의 활약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하는데, 조선 숙종 때 북평사를 지낸 최창대(崔昌大)가 길주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정문부는 그 후 함경도의 영흥, 온성, 안변 등지의 부사를 역임했고, 길주목사를 역임했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습니다. 광해임금이 선 후 남원부사를 거쳐 다시 길주목사에 차출되었으며, 광해군 8년(1616년)엔 분도총부(分都摠府) 분총관에, 이듬해엔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장단부사, 창원부사 등의 외직으로 돌고 높이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사관은 이에 대해,
<너무 강직한 성품에 교제가 많지 않아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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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는 그러다가 1624년(인조 2년)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상중임에도 부총관에 임명되지만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박래장(朴來章)의 옥사>가 일어납니다. 박래장 등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는데요, 정문부도 장차 설득하여 역모에 참여시키고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진술이 나왔고, 정문부는 역모죄로 하옥되었습니다. 대질심문에서 무죄가 밝혀졌지만 정문부가 지은 <<초회왕(楚懷王)>>이라는 시 때문에 다시 형신을 당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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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地靑山有九疑(초나라 땅 청산에 구의산이 있으매)
懷王何事信張儀(회왕은 어쩌자고 장의를 믿었던고)
商於六百終難割(상오 땅 육백 리는 결국 어지러이 찢기었으니)
湘水空流不盡悲(상강은 덧없이 흘러 끝없는 슬픔이로다)
楚雖三戶亦秦南(초나라 세 집만 남아도 진나라는 망한다는)
未必南公說得武(남공의 예언은 여지없이 빗나가서)
一入武關民望何(한 번 무관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은 사라졌으니)
孱孫何事又懷王(나약한 자손 하찮게도 또 회왕이련가)
이것이 정문부가 지은 시 <<초회왕>>입니다. <구의산>은 순 임금의 묘가 있는 산인데요, 초나라 땅에 구의산이 있다는 것은 초나라가 순 임금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장의는 합종연횡의 소진과 장의의 그 장의인데, 초회왕은 진나라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거짓말에 속았고, 진나라 소양왕의 계략에 말려들어 무관에 갔다가 사로잡혀 함양성으로 압송되고 소양왕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문부는 초회왕의 그 어리석음을 말하며 <나약한 자손 하찮게도 또 회왕이련가>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 부분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정문부를 제거하려던 세력은 정문부가 이 시에서 인조를 어리석고 나약한 초회왕에 비유했다고 몰아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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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는 끝까지 원통함을 주장하다가 형장을 맞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정문부는 1588년(선조 21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지만 장군이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정문부 장군은 그 후 함경도 사람들의 송원으로 신원이 이루어졌고, 1666년, 현종 7년에는 함경감사 민정중(閔鼎重)의 계청과 수찬 이단하(李端夏)의 상소로 우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창렬(彰烈)이라는 묘호가 내려졌고, 1713년(숙종 3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함경도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와 부령의 청암사(靑巖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 <<농포집(農圃集)>>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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